1938년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사가 작가 허버트 조지 웰즈의 SF소설 '우주전쟁'을 각색해 방송했다. '우주전쟁'은 화성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라디오에서는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가짜 뉴스를 제작해 내보냈다. 그런데 가짜 뉴스를 들은 청취자들이 이를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이면서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등 대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이 사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이하 페이크 다큐)’의 시초로 남았다.
페이크 다큐는 허구의 상황에 다큐멘터리의 사실주의 기법을 도입한 콘텐츠 장르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스릴러나 공포 영화의 긴장감을 살리기 위해, 방송에선 실제 사건을 재구성하거나 해학 코미디를 구현하는 장치로 많이 활용됐다.
국내 예능계에서는 Mnet '음악의 신'이 페이크 다큐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콘텐츠로 꼽힌다. 시즌2 4회째, 시청률 측면에서 아직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꾸준히 호평을 받고 있다. 톱스타도 없고 구성이 탄탄하지도 않은 '음악의 신'은 어떻게 예능 대세가 됐을까.
공포영화서 극적 장치로 활용
1984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는 최초의 페이크 다큐 영화로 평가된다. 가상의 록 밴드가 미국 순회 공연을 다니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코미디물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됐다. 이 촬영 기법은 이후 여러 공포 영화에 쓰이며 새로운 포맷을 만드는 양분이 됐다.
이 영화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1999년 공포영화 '블레어 윗치'는 배우들이 직접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하며 사실적인 구도를 잡아낸 것이 특징이다. '블레어 윗치'가 제작비의 400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들이면서 흥행하자, 페이크 다큐는 공포 영화 제작자들이 즐겨 활용하는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클로버 필드', '파노라말 액티비티', '크로니클', '디스트릭트9' 등을 거치며 페이크 다큐 공포 영화는 더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형태로 진화했다. 카메라가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개연성 없이 다른 녹화 장면으로 넘어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을 극 중의 인물로 끌어들였다.
국내에서는 2003년 윤중현 감독이 최초로 페이크 다큐 공포영화 '목두기 비디오'를 공개했다. 온라인상으로 공개된 '목두기 비디오'는 페이크 다큐라는 사실을 공지하지 않아 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면서 극장 개봉까지 하는 등 의외의 성과를 이뤘다.
미미하지만 상업영화 제작사도 페이크 다큐의 효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9년 '여배우들'은 패션지 화보 촬영을 위해 모인 여배우들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스크린을 채운다. 시나리오에 구애 받지 않고 실제 대화를 그대로 살려 연예계 이면에 대한 대중의 궁금증을 해소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우 이미숙은 당시 제작발표회에서 "여배우들끼리 샴페인을 마시면서 대화하도록 감독이 내버려 뒀다"며 "스크린에 대고 한 게 아니라 우리들끼리 한 대화였다. 배우로 살아가면서 힘든 부분들, 살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 3월 개봉된 영화 '섬, 사라진 사람들'은 페이크 다큐와 극 영화라는 두 형식을 결합한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포커스 아웃 효과, 핸드헬드(카메라를 손으로 들어 촬영) 방식을 활용해 사실감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지승 감독은 2월 언론시사회에서 "1시간 동안 극중 카메라 기자 석훈이 찍은 영상을 관객이 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진짜 카메라 기자가 현장을 찍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촬영했다"고 밝혔다.
예능에 침투한 페이크 다큐
국내 방송계에 페이크 다큐 기법이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는 '우주전쟁' 소동을 연상케 하는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7년 tvN '독고영재의 스캔들'은 방영 당시 온라인 상으로 방송이 사실인지를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불륜 현장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하는 형식의 재연이었지만, 페이크 다큐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시청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독고영재의 스캔들'은 선정적인 장면으로 뭇매를 맞았지만, 페이크 다큐가 자극적인 소재에만 활용된 것은 아니다. 영화 '쎄시봉'의 김현석 감독은 2011년 MBC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타임'에서 페이크 다큐 드라마 '돈'을 선보였다. '돈'은 여의도 한복판에 돈을 뿌리려는 장세춘과 두 아들의 사연을 담아 돈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세태를 꼬집는 작품이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2억원의 돈과 이를 줍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현장감 있게 담았다.
2010년 원조 개가수(개그맨+가수) UV가 페이크 다큐에 B급 개그를 녹여내면서 새로운 포맷의 예능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UV는 Mnet 'UV 신드롬'에서 진짜와 가짜를 오가는 장면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잡았다. 당시 방송에서 홈쇼핑을 통해 새 앨범 '집행유예'를 판매하는 장면이 그려졌는데, 설정이 아니라 실제 앨범을 판매하는 홈쇼핑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다음해 'UV 신드롬 비긴즈'가 방영되고 비슷한 포맷의 예능들이 등장하면서 페이크 다큐 예능이 정착했다.
'UV 신드롬'으로 페이크 다큐의 진수를 보인 박준수 PD는 2012년 가수 이상민을 내세워 '음악의 신'을 제작했다. '음악의 신'은 'UV 신드롬' 보다 주변 인물의 역할을 넓히고 1990년대 활동한 스타들을 활용해 더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갔다. 그 해 개그맨 유세윤이 영상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는 내용의 Mnet '유세윤의 아트비디오'가, 2013년 가수 이정이 신개념 음악토크쇼를 론칭하는 과정을 담은 '방송의 적'이 방영돼 페이크 다큐 예능의 전성기가 열렸다.
'음악의 신', 날 것의 신선함이 생명
2014년 Mnet '엔터테이너스'가 굴욕적인 조기 종영을 맞은 후 한동안 잠잠했던 페이크 다큐 예능이 '음악의 신2'로 다시 활기를 찾는 모양새다.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새로 투입된 가수 탁재훈이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시즌1 보다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해 기존 멤버 이수민을 재영입하고 새로운 게스트를 활용하면서 기존의 페이스를 찾아가고 있다. 최근엔 댄스 트레이너로 등장한 가수 정진운이 대본에 얽매이지 않은 애드리브를 선보여 예능 샛별로 부상하기도 했다.
'음악의 신'이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꾸준한 인기를 이어온 데엔 B급 개그 코드와 페이크 다큐의 결합에서 오는 시너지 작용을 무시할 수 없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혼동되는 상황과 신랄한 대사에서 날 것의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다. '음악의 신2'의 한 제작진은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거짓말을 만들거나 사실을 과장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거짓인 걸 알고도 순간 진짜로 착각하는 현상을 겪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음악의 신'은 이전 페이크 다큐 예능 보다 사실을 더 과장한 측면이 있다. 이상민이 갖고 있는 양아치, 사기꾼 캐릭터를 확대 해석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시청자가 공감과 재미를 느끼는 듯하다"며 "자연스러움이 생명이라 제작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편 페이크 다큐는 문화계를 넘어 마케팅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014년 숙취해소제 '레디큐'는 유튜브를 통해 페이크 다큐 광고를 공개하며 젊은 소비자를 겨냥한 마케팅을 펼쳤다. 가수 케이윌은 그해 5번째 미니앨범 홍보를 위해 페이크 다큐 영상을 제작했다. 해당 영상은 가수 아이유, 비스트 이기광, 씨스타 소유 보라 등 동료 연예인들이 케이윌과 얽힌 에피소드를 밝히며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31일 '제 29회 세계 금연의 날'을 맞아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태로 제작한 금연광고 시안을 공개했다. 사실성을 강조한 영상을 통해 흡연이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계획이다.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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