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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묘한 풍경

입력
2016.06.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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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농촌에서는 바쁜 농사철에 가장 많이 외식을 한다. 일손을 얻어서 일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식구들끼리 일할 때도 점심을 밖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잦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일손이 달려서다. 식사를 준비하는 데에 시간을 쓰느니 식당에서 후딱 먹고 오는 편을 택하게 된 게 십여 년 전부터인 것 같다. 특히 사람을 여럿 쓰는 과수원 같은 곳에서는 집에서 점심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우리 과수원에도 일 년에 몇 차례 남의 손을 빌고 가까운 이들끼리 품앗이도 하는데 내남없이 이제는 집에서 밥을 해내지 않고 식당으로 향한다. 우리 마을은 보통 일곱 시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커피를 마시고 아홉 시께 새참을 먹기 때문에 점심은 한 시 어름에 먹는다. 농촌이라도 대부분이 차가 있고 가까운 면소재지에만 가면 식당이 즐비하니 메뉴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트럭 짐칸에 사람이 타는 것은 불법이지만 설령 경찰이 본다 해도 요즘은 눈을 감아준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잠깐 불법을 저지르는 셈이다. 하여, 점심시간이 되면 수많은 트럭이 사람을 때로는 십여 명이나 짐칸에 싣고 줄줄이 면소재지에 나타난다. 그냥 일하던 옷에 마치 투구처럼 얼굴과 옷을 가린 모자를 쓴 백여 명 이상의, 주로 여성 노인들이 한꺼번에 트럭에서 내리는 이 광경은 새로 생겨난 기묘한 풍경이다. 대개 서로 아는 얼굴들이라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이곳저곳의 식당으로 흩어지는데 기왕 나와서 먹는 철이니 이 기회에 면내의 식당을 이곳저곳 섭렵해보는 것이다.

두 번째 기묘한 풍경은 식당 안에서 벌어진다. 요즘 면내에는 갑자기 두부와 산나물을 위주로 하는 식당이 많이 생겼다. 두 가지 모두 시골 사람들이 보통 먹는 음식이니 농촌 주민을 상대로 한 게 아니다. 그들이 노리는 손님은 바로 근처에 생긴 골프장을 오가는 고객들이다. 도시를 떠나 운동을 하러 농촌에 왔으니 시골스런 밥상을 찾을 것이로 생각하는지 노골적으로 ‘시골밥상’이란 간판을 단 식당까지 생겼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조그만 시골 동네에 손 두붓집이 무려 네 개나 있고 나 역시 두부를 몹시 즐기는 편이라 점심을 먹을 때면 그중 하나로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식당 안에는 실로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당연히 골프장 손님과 일을 하다 온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서로를 알아본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이들과 트럭 꽁무니에 실려 온 이들의 행색이 비슷할 수야 없겠지만, 운동하다 온 이들과 일을 하다 온 사람들의 땀 냄새도 아예 다른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렇게 자리를 정해주지 않았건만 어느 때부터 식당 안이 홍해처럼 갈라져서 한쪽은 골프계, 한쪽은 농업계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일단 손 두부에 이끌려 같은 식당에 들어온 사이지만 그래도 서로의 땀 냄새를 맡는 일만은 삼가 피하는 게 낫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무슨 계급적 적대가 풍기는 광경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꼭 한 번 낮술 한 잔을 걸친 젊은 농부가 ‘팔자 좋은 인간들 많네’라는 한 마디를 내뱉었지만 홍해 건너편까지 들릴만한 데시벨은 아니었다. 진짜 분위기는 아주 조용하다. 각자 조용히 자기 앞의 밥과 두부전골에 묵묵히 숟가락질할 뿐이다. 골프계야 본래 교양이 배어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지만 보통 왁자지껄하게 마련인 농업계의 식탁조차 조용하기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연로한 데다 얼른 밥을 먹고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오후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진영이 서로 양보하며 눈인사 정도를 건네는 것은 식당 안에 하나뿐인 커피 자판기 앞이다. 내가 본 경우는 대개 골프계가 농업계에게 양보하는 모습이었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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