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남부의 끝자락,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모든 세계를 품고 있었다. 케이프타운의 롱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유럽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다가도 드넓은 초원에서 사자와 버펄로 같은 야생동물과 마주하면 영락 없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대륙이 아프리카임을 깨닫는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검푸른 물결에 가슴 뭉클하고 남극에서나 볼 법한 야생 펭귄에 감동한다. 석양이 떨어지는 포도농장을 배경으로 와인을 마시노라면 고대 그리스의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오랜 세월 지속된 인종차별정책의 그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형형색색의 매력을 품은 풍경만큼은 넬슨 만델라가 강조했던‘무지개의 나라’였다. 8박 9일 간 경험한 남아공의 단면이다.
‘빅파이브(BIG FIVE)를 찾아라.’ 남아공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파리투어(이곳에서는 ‘게임드라이브’라고 표현한다)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미션이다. 빅파이브는 레오파드라 불리는 표범, 버펄로, 사자, 코뿔소, 코끼리 등 사냥하기 힘든 야생동물. 게임드라이브를 즐기는 동안 이 다섯 종류의 동물을 모두 보게 되면 ‘임무 완수(?)’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한다. 크루거 국립공원 인근의 게임리저브에서 2박 3일 간 게임드라이브를 즐길 기회를 가졌다. 크루거 국립공원은 남아공 동부 끝자락으로 모잠비크의 림포포 국립공원과 연결된 대규모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다. 2만㎢로 대한민국 면적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광활한 숲이다. 게임리저브는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숲과 초원에 넓은 규모로 울타리를 치고 사파리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구역이다. 사파리 전용차량으로 야생동물을 추적할 수 있도록 비포장 도로를 냈고, 호텔 수준의 고급 숙박시설인 로지(lodge)도 보유하고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소형 비행기로 2시간 30분을 날아 스쿠쿠자(Skukuza) 공항에 내렸다. 말라말라(Malamala) 게임리저브까지는 공항에서 또 차로 1시간 가량이 걸렸다.
늦은 오후 무장을 한 레인저(전문 사파리 가이드)가 이끄는 사파리 전용차량을 타고 드디어 게임드라이브에 나섰다. ‘숨은 그림 찾기’나 보물찾기에 나선 것처럼 두근거린다. 빅파이브를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지나쳤나 보다. 풀숲에서 금방이라도 맹수가 튀어나올 듯 하고, 드넓은 초원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버펄로의 뿔이나 원숭이로 보이기도 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이번엔 진짜 ‘숨은 그림’을 찾았다. 레인저가 갑자기 방향을 틀고 수풀이 우거진 곳에 다다르더니 차를 멈춰 세웠다. 바로 앞에 수사자가 수풀 속에 드러누워있었다. 역시 전문가의 눈썰미는 다르다. 레인저들은 동물 발자국과 배설물을 관찰하거나 다른 동료들과 무전 교신을 통해 빅파이브를 찾는다. 기린과 사슴의 일종인 임팔라만 수없이 보다가(사실 이것만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빅파이브와 마주하니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사자 밥이 될지도 모른다. 게임드라이브에 나서기 전 레인저는 사파리 도중 절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야생동물은 사파리 차량과 탑승자를 한 덩어리로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덤비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야생에 노출됐을 때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목숨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두 번째로 만난 빅파이브는 해질 무렵 마주한 코끼리였다. 코끼리는 주로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아기 코끼리들을 중간에 세우고 앞뒤로 어른 코끼리가 호위하며 줄을 지어 이동한다. 석양이 내리는 말라말라 초원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코끼리 가족의 모습이 한없이 평화롭다.
이튿날 새벽, 게임리저브에서 가장 날렵하다는 표범이 바로 코앞에 어슬렁거리고 무시무시한 뿔을 가진 버펄로를 마주하자 혹시나 공격하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레인저가 총을 소지하고 있지만 무방비상태인 여행객에게 갑자기 달려들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전날 만난 수사자 가족이 입 주변에 빨간 피를 묻히며 사냥한 사슴 고기를 뜯는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사실 맹수의 신경을 건드릴까 사진 찍기조차 주춤거리고 조심스러웠다. 현지 가이드는 “동물들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아닌 이상 (사람이) 차 위에서 일어서거나 소리를 내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빅파이브 가운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애를 태운 건 코뿔소였다. 다른 동물과 달리 코뿔소 사진을 찍을 땐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다. 밀렵꾼들이 휴대전화 GPS(위치확인시스템)를 통해 위치를 추적, 코뿔소를 사냥하는 일이 횡행하기 때문이란다. ‘동물의 왕국’답게 빅파이브는 2012년까지만 해도 남아공의 화폐 주인공이었다. 가장 낮은 단위인 10랜드에는 코뿔소, 가장 높은 단위인 200랜드에는 표범이 인쇄돼 있었다. 그러나 2012년 ‘남아공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넬슨 만델라의 얼굴을 화폐에 넣기로 결정하면서 빅파이브는 뒷면으로 밀려났다. 참고로 남아공에서 사자와 호랑이를 동시에 봤다는 무용담을 들었다면 그것은 100% 거짓말이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북반구에 주로 서식하는 호랑이와 곰은 남반구인 남아공에서는 볼 수가 없다.
남반구의 밤하늘을 유난히 발갛게 물들이는 노을이 사라진 후에 야밤에 즐기는 게임드라이브도 묘미가 있다. 사파리는 야생동물의 움직임이 잦은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부터 밤 시간에 진행한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요한 초원을 달리노라면 대자연의 평온한 숨결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진다. 유난히 깊은 아프리카 밤하늘에 선명한 별빛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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