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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ㆍ가습기ㆍ구의역

입력
2016.05.3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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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비염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아침에 깨거나 샤워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 줄줄 콧물이 흐른다. 목으로도 넘어가 재채기가 쉴새 없이 나온다. 원인이 10여 년 전 하던 수영 때문이라고 믿어 왔다. 소독을 위해 타놓은 염소 냄새 풀풀 나는 수영장 물이 코며 입으로 들어가기 일쑤였고, 그때부터 줄줄 콧물 흐르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영을 그만뒀지만 병원을 다녀도 증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아내가 “당신 비염 언제부터 생긴 거지”라며 이 증상의 원흉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기했다. 바로 ‘가습기 살균제’다. 살(殺)생물제로 만든 가습기 살균제의 어처구니 없는 허가ㆍ제조ㆍ판매가 뒤늦게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서 거론되는 피해 사례 중에는 천식, 비염 같은 게 있었던 거다. 아내는 우리도 적잖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며, 내게 비염 증상이 눈에 띄게 심해진 게 그 이후부터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애초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적이 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로서는 그때 옥시를 썼는지 애경을 썼는지 알 턱이 없고 또 실제 사용을 증명할 구매영수증 같은 걸 갖고 있을 리도 없다. 게다가 천식, 비염 증상은 설사 가습기 살균제 사용을 입증해도 이번 사건의 범위에 포함될지 불투명해서 지금으로선 배상 같은 건 언감생심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일로 몸서리치며 느낀 바가 있다. 감기 걸리지 말라고 틀어 놓는 가습기를 좀더 청결하게 쓰고 싶어 넣은 살균제를 무방비 상태로 들이마셔 아이가 죽고, 엄마가 죽고, 뱃속 아이와 엄마가 같이 죽는 일이 그저 신문에서나 보는 남의 일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제주행 연안여객선을 탔다가, 설마 구조되지 못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결국 차가운 물에 처박혀 죽고 마는 일 역시 타인의 불행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이다.

더욱 살 떨리는 것은 이 사건들이 근본적으로 피해자 개개인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학여행의 기대에 부풀어 있던 어린 학생들과 일반 탑승객들을 죽인 것은 탐욕스런 이권ㆍ금전 추구, 저열한 안전 의식, 이름뿐인 행정ㆍ구조 능력 등 정치ㆍ행정ㆍ기업의 얽히고 설킨 부정과 무능 구조다. 돈 벌려는 욕심만 앞서 치명적인 물질로 살균제를 만든 기업, 그런 물질 사용을 버젓이 허가한 정부, 사건이 불거지고 5년이 지나서야 수사에 의욕 내는 사법 당국 역시 현재 드러난 것만 2,000명에 가까운 가습기 피해자들을 사지(死地)로 몰아 간 구조적인 살인자들이다.

사건이 난 뒤 이구동성으로 재발 방지를 이야기하지만, 두렵게도 이런 구조적인 사고는 얼굴만 바꿔 계속되고 있다. 서울 구의역에서 전동차에 치어 죽은 19살 스크린도어 수리공의 경우라고 다를까.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을 빼앗길 작업을 영세 외주업체에 맡기고, 적당히 안전수칙을 무시한 작업이 당연하다는 듯 반복되고, 그런 가운데 이미 두 차례 사고가 났는데도 근본적으로 상황을 개선하지 않은 결과다. 돈에 대한 욕심, 안전 무시, 구조적인 위험을 개선하려는 의지의 부족이 낳은 참사다.

엊그제 문을 연 20대 국회 첫 날에 50건이 넘는 법안들이 제출됐는데 민생 관련 법안들이 많았다고 한다. 경제를 살려 서민들의 이마에 깊어진 주름을 펴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다. 세월호와 가습기 살균제와 구의역 사건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재발하지 않도록 이 사회의 구조를 고치는 일이다. 사건 원인을 규명해서 이 같은 구조적인 살인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우선 조사 시한이 다가온 세월호 특조위가 계속 가동되도록 세월호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 한시바삐 가습기 살균제 청문회로 책임을 낱낱이 규명해야 한다. 비용 절감만 앞세운 노동 외주화를 법으로 막아야 한다. 여소야대에 희망을 걸어 본다.

김범수 문화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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