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 이슈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누군가의 고발로 형편없는 수준이 화제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번역은 사실상 원문을 ‘거의’ 완벽하게 대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는 것은 대저 무엇인가? 보들레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보들레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번역이 아닌가? 문학이 한 시대의 위대한 창작이라면, 번역은 이 창작을 외부의 세계에 내놓을 유일한 통로이자 창작의 맨얼굴 자체라고 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번역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치명적이어서 중요성을 지닌다. 외국작품을 수용하는 문화권에서 볼 때, 번역은 사실상 독자들이 유일하게 읽는 책이며 독자들 대부분은 원문을 모른 채 독서에 임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번역이 난해한 원문을 읽기 쉽게 멋대로 풀어놓아 빚어진 결과거나, 반대로 읽기에 몹시 까다로워 외면을 받은 번역이 원문의 섬세한 문체와 원문의 특징을 반영하려 고심한 결과인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번역은 하나지만, 번역이 독자들에게 지어 보이는 표정은 이처럼 아수라 백작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번역에 요청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간 번역의 방법으로 제시되었던 ‘정답’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낱말 하나하나를 정확히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저자의 의도를 잘 전달하기 위해 의미의 포착에 주력해야 한다는 견해 역시 빈번히 등장하였다. 번역의 방법은 이렇게 우리가 흔히 ‘직역’ 혹은 ‘의역’이라 부르는 두 가지 패러다임에 갇힌다. 번역 방법이 세 가지, 열 가지를 노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 두 패러다임을 진리인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글의 성격이다. 어떤 글인지 따져보는 작업이 두 개의 선험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를 수용하는 행위에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번역의 방식은 두 개가 아니라 번역하려는 텍스트의 특성과 집필된 목적에 따라, 매번 고유한 방식을 고안해야 할 정도로 제 가짓수를 늘린다. 가령,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삼은 신문기사의 번역은 무엇보다도 정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주렁주렁 말풍선이 가득한 만화라면 대화의 특징을 우리말의 어법에 맞추어 유연하게 조절해낼 수밖에 없다. 또한 광고 문구의 번역은 간결한 문장에서 뿜어 나오는 타 문화의 낯섦을 센스를 살리려 최대한 반영하는 능력에서 승패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혹여 그것이 국가의 보안과 관련된 일급 문서라면 번역이 가장 공들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안의 정확성과 사실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작품의 번역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문학 번역은 문학적 요소들을 번역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텍스트를 ‘문학이게 해주는 것’을 번역하기, 다시 말해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문장의 특수한 구성이나, 작가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었을 문체, 고유한 리듬이나 어휘의 독특한 사용 등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 부르는 요소들이야말로 번역가가 제 모국어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핵심이다. 우리가 문학 번역을 나의 문자로 타인의 문자의 가장 깊은 저변을 파헤치는 작업이자 나의 문장으로 타인의 문장의 가장 조밀한 조직을 길어 올리는 시도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학 번역은 의미의 두께를 결정하는 원문의 특수한 결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은 정보를 담은 쪼가리나 화장품 사용설명서와는 다른 것이다.
‘특수하다’고 말하는 모든 대목은 번역가가 가장 공들여야 하지만 난항을 겪는 대목이기도 하다. 문학 작품의 특수성은 낯설고 신비하기에 번역가뿐만 아니라 독자나 비평가조차 끊임없이 사로잡는다. 번역가의 눈은 이렇게 비평가가 제 비평의 단초를 얻으려 골몰히 들여다보는 지점을 함께 바라보면서 자주 반짝거릴 수밖에 없다. 번역이 가장 강력한 독서이자 비평적 성격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왜 그런가? 당신이 만약 조세희의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면, 당신은 단문으로 이어진 구성을 마주하여 단문들 사이 접속사를 부러 생략해놓은 느낌을 받는다 해도, 당신 모국어의 자연스러움을 빙자해 접속사를 끼워 넣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조세희의 저 어휘들이 지나치게 밋밋하다고 판단하여, 엇비슷한 뜻의 한결 멋들어지고 사변적인 낱말로 바꾸어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해버리면, 노동자와 빈민층이 구사하는 언어의 특성을 살려 조세희가 펼쳐 보이려 했던 난장이의 세계가 거인의 그것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김승옥의 소설을 번역해야 한다면, 당신은 조세희의 글에서 겪었던 고통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엇비슷한 무게로 당신의 어깨를 짓누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독하게 엉킨 복문이나 혼합문, 심지어 무언가를 번역해 놓은 어색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피동형 문장 때문에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거나, 과거와 현재의 현란한 교차 서술이나 말장난에서 뿜어 나오는 아이러니를 기이하게 바라보며 당신의 메모를 한없이 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 번역에서 크고 작게, 혹은 알게 모르게 번역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그러니까 거개는 잘 읽히지 않아 이해의 자장을 자주 벗어나고 종종 단일한 의미로 수렴되지 않아 독창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이 대목들은 번역이 함부로 지워낼 수 없는 곳이며 작품 고유의 특성이 한껏 적재된 장소이기에 오히려 번역이 집중해서 살려내고자 노력해야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주 잊고 있는 것은 번역이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소설을 소설로 번역하기, 시를 시로 번역하기, 문학을 문학으로 번역하기에는 그래서 어려움과 중요성이 공존한다. 어려움은 지워낸 번역-병합하는 번역-길들여진 번역-문학을 부정하는 번역의 가장 타당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작품성을 희생하고 낯선 것을 거부하는 번역, 자기 정체성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번역이자, 모국어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작업을 포기한 대가로 통념을 반복하고 확인하는 번역이며, 미지(未知)를 저버리고 기지(旣知)를 강화하는 번역이자 문학성을 포기한 번역일 뿐이다. 원작이 매우 특수한 형태의 저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면 번역도 반드시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
문학성과 특수성을 희생한 대가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신비한 괴물이 아니라 길들여진 강아지일 뿐이며 이 강아지는 문학이 아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가 번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이 상식과도 같은 주장은, 자주 문학을 문학으로, 작품을 작품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여 상식을 벗어난다. 문학을 문학으로 옮기려는 열정의 소유자만이 문학의 가치를 타자 앞에 펼쳐 보일 줄 아는 번역가인 것이다.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