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정책평가硏 2014년 보고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언급하며 살생물제 제한적 관리 등
시행 앞둔 ‘화평법’ 한계 지적… 산업-생활용 같은 잣대도 문제
“모든 살생물제 관리ㆍ책임지는 단일한 주체가 마련돼야”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에도 거듭 국책연구기관이 국내 살생물제 관리체계를 전면 재정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는데도 정부가 방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부는 사건이 발생하고 5년이 지나서야 살생물제 안전관리 종합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이 2014년 7월 발표한 ‘국내 살생물제 관리법 제정 방안’ 보고서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언급하며 ‘전 세계적으로 살생물제 관리가 강화되는 추세지만 국내에서는 아직도 살생물제가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1999년에도 KEI는 ‘Biocides의 국내 관리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살생물제는 인체 접촉 빈도가 높지만 농약이나 의약품에 비해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단초를 제공했고, 사태가 불거진 뒤에도 이어진 경고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2014년 보고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계기로 마련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시행을 앞두고 화평법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했다. 이 법이 관리하는 살생물제 대상이 너무 제한적이며, 위해성 평가 체계도 미흡하다는 것이다. 현행 화평법은 소독제ㆍ방충제ㆍ방부제를 살생물 제품 3종으로 규정하고 이를 포함해 인체 위해 우려가 있는 제품 15종을 생활화학제품으로 지정,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지 않는 화학제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산업통상자원부가 따로 관리해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반면 유럽은 유럽연합 산하 유럽화학물질청(ECHA)이 살생물제를 일괄 관리한다. 박정규 KEI 선임연구위원은 “살생물질은 소량으로도 제품 대량생산이 가능한데, 현행 화평법은 연간 취급량이 1톤 미만인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규제를 하지 않아 사고위험이 상존한다는 점도 수차례 개선 과제로 지적돼 왔다”고 30일 말했다.
현행 화평법의 위해성 심사 체계가 여러 종류의 제품을 동시에 썼을 때 생기는 피해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허점도 지목됐다. 유럽과 미국은 어떤 살생물질이 다양한 제품에 들어가 함께 사용됐을 때 그 물질의 총량이 인체에 미치는 ‘누적효과’에 대해서도 심사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누적효과라는 개념조차도 생소한 실정이다. 또 제품에 포함된 살생물질이 본래 의도한 미생물만 죽이기 위해 적정한 농도로 사용된 것이 맞는지를 따지는 ‘효능 평가’도 국내에서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화학물질이 산업용으로 쓰일 때와 생활용품으로 사용될 때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데도 화평법이 같은 잣대로 취급한다는 점도 문제다. 유럽의 경우 산업용 화학물질 규제는 신화학물질 등록제도(REACH) 관련법으로, 살생물제는 살생물제관리법(BPR)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국내 화평법은 유럽의 REACH를 본떠 산업현장의 노동자 보호가 중심”이라며 “일반인 입장에서 유해물질 사용이 얼마나 괜찮은지 등 구체적인 기준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수 환경안전건강연구소 소장은 “20대 국회가 동일한 잣대로 모든 살생물제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단일한 관리 주체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다음달 발표 예정인 생활화학제품 안전관리 종합대책에 개선 방안을 담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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