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농협은 농식품 수출용 공동브랜드를 만들었다. 수출 농산물을 하나의 브랜드 아래 묶는다는 얘기인데, 뉴질랜드의 제스프리(Zespri)를 벤치마킹 했다. 뉴질랜드가 1996년 만든 키위 공동브랜드 제스프리는 세계시장 30%를 점유하는 일등 브랜드이자,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고유명사 중 하나다.
그런데 농협이 한국형 제스프리를 만들겠다며 제시한 브랜드의 이름은 뭘까? 바로 ‘NH K-FARM’이다. 농협의 NH와 코리아의 K가 연달아 자리잡은 이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 이름에선 작명에 참여한 관계자의 ‘회사 생각하는 마음’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만 느껴질 뿐, 한국 농산물이 어떤 특징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정작 농협이 따라 하겠다고 한 제스프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봤는데, 과정이 참 독특했다. 제스프리는 어떤 구호나 지명, 또는 약자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그것도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컴퓨터가 특정 단어를 조합한 이름이다.
당시 뉴질랜드 키위산업 관계자들은 새로 만들어지는 브랜드 이름에 ‘생기 넘치는(vibrant)’, ‘몸에 좋은(healthy)’, ‘기운 넘치는(effervescent)’, ‘풍미가 강한(zesty)’ 등의 형용사 이미지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단어를 컴퓨터에 넣고 돌려 나온 결과가 바로 제스프리다.
한국식으로 접근했더라면 이름엔 분명히 NZ(뉴질랜드의 약자)가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작명 담당자는 NZ를 단어 어디에라도 밀어 넣으려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발음했을 때 상쾌함과 청량감이 느껴지는 제스프리란 이름은 탄생하지 않았을 게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의 협동조합 브랜드로 시작한 썬키스트(Sunkist)에도 지역이나 생산주체 이름은 들어가지 않았다. 태양의 입맞춤(sun kissed)에서 살짝 철자를 고쳐, 강렬한 태양에서 자라는 건강한 농산물에 어울리는 브랜드 이름을 만들었다.
여기서 ‘NH K-FARM’ 사례만 드는 것은 농협 입장에선 좀 억울한 일일 수 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요즘 한국형 상품 또는 한류 관련 대책이라며 만드는 이름들은 어김 없이 K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수산물 수출 통합브랜드의 이름은 ‘K-FISH’이고, 신도시 개발 수출 브랜드 이름은 ‘K-city’이다. K-Global(정보통신 창업ㆍ벤처지원사업), K-experience(한류를 경험하는 문화복합공간), K-타워(이란에 설치하기로 한 한류공간) 등 K로 시작하는 단어 천지다.
K시리즈의 유행은 K팝의 성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브랜드라고 해서 꼭 K자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공급자 관점에서 생각한 고정관념이다. 외국인들이 과연 K를 보고 한국을 떠올릴까?
연이은 K시리즈의 등장은 그저 상상력 부족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그런데 유행어처럼 남용되는 K는 어쩌면 수출용이 아니라 국내용 접두사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임명권자나 윗사람에게 나의 능력만큼 애국심과 국가관까지 과시하고픈 의도. 정부가 나라 사랑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한 ‘애국심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작명법이 바로 K시리즈다.
다시 농협 얘기로 돌아가자. 브랜드를 무엇으로 정하든 그들의 자유지만, NH K-FARM이라는 이름만은 좀 재고를 했으면 한다. 뉴질랜드가 컴퓨터를 돌려 제스프리를 만들었을 때가 20년 전, 486이나 586 컴퓨터가 주종이던 시절이다. 인공지능(AI)이 바둑의 영역에 도전하는 지금이라면, 차라리 사람 대신 컴퓨터에 맡기더라도 좀 더 참신한 브랜드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애사심과 애국심이 결합한 NH K-FARM은, 띄어쓰기를 안 하면 ‘일본 공영방송(NHK)이 소유한 농장’이 돼 버리는 이상한 조합이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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