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이 지대가 낮아 장마 때 방에 물이 차고 그랬는데….” 밴드 산울림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김창훈(60)은 4년 만에 낸 신곡 ‘흑석동’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동네를 최근 기자와 둘러보며 추억에 잠겼다. 흑석동 주민센터 맞은편,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재개발 지역을 걷다 허름한 목욕탕을 보고 반가워하는 모습이 꼭 소년 같았다.
흑석동은 ‘산울림의 고향’이다. 김창훈은 만 네 살 때인 1960년부터 산울림으로 데뷔한 1977년까지 흑석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음악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가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해 왔던 터라, 형 김창완과 2008년 세상을 뜬 동생 김창익과의 추억이 서린 흑석동이 더욱 각별하다.
산울림 삼형제가 음악을 시작한 곳도 이 동네다. 김창훈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기타를 잡았다. 대학생이 된 형 김창완이 고물상에서 통기타를 사 와 집에서 연주하는 걸 보고는 흥미를 느꼈다. ‘전자 악기’는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다. 중학교 1학년이던 막내 김창익은 책 여러 권을 쌓아 놓고 은수저로 두드리며 형들의 기타 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어머니가 행여 도둑 맞을까 찬장에 숨겨 두고 썼던 은수저를 드럼의 스틱처럼 쓴 것이다. 삼형제는 그렇게 어설프지만 신나는 연주를 배경 삼아 곡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4년 뒤 김창훈이 대학에 입학한 뒤 삼형제의 ‘음악판’은 더 커졌다. 김창완과 김창훈은 과외비를 모아 흑석동 악기점에서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샀다. 합주실은 집이었다.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 악기 연주 때문에 동네 시끄럽다고 반상회에서 난리가 났다. 항상 모범생 소리를 듣던 삼형제가 이때 처음으로 동네 주민들 눈총을 받았다”고 전했다. 삼형제는 합주실로 쓰던 방에 방음을 위해 계란판을 덕지덕지 붙였다. 1977년, ‘아니 벌써’를 내고 가요계에 출사표를 던지기 직전까지 산울림 삼형제가 흑석동에서 밟은 음악 여정이다.
“아, 아무것도 모르고, 그랬었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 하늘 그때 그 거리 모든 게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날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김창훈은 지난 2월 ‘흑석동’을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대치동에서 1년 6개월 전 흑석동으로 다시 이사해 옛 추억이 돋을새김된 게 창작의 불씨가 됐다. 낭만만 떠오른 건 아니다. 고향에 오니 막내 동생의 빈 자리는 크게 느껴졌다. 그는 ‘흑석동’에서 “웃으며 보냈네. 그게 마지막인 줄 모르고, 모르고”라고 한탄한다. 김창훈은 지난달 흑석동에 사는 어머니를 모티프로 ‘어머니’란 곡도 냈다.
형의 자극, 산울림 40주년…4년 만에 시작된 김창훈의 노래
김창훈은 오는 10월 발매를 목표로 4집 ‘호접몽’(가제) 준비에 한창이다. 2012년 발매한 3집 ‘행복이 보낸 편지’ 이후 4년여 만의 본격적인 음악 활동 재개다. 오랜 만의 앨범 작업을 자극한 건 그의 형, 김창완이었다.
“지난 1월 형을 만났어요. ‘너도 곡 좀 써라’ 하더라고요. 형이 신곡 ‘시간’을 쓰고 들려주는 자리였는데, 큰 자극이 돼 앨범을 준비하게 됐죠.”
CJ푸드 미국지사에서 일하다 1년 6개월 전 퇴사해 시카고 등지에서 식품 관련 마케팅을 하며 한결 여유로워진 일상도 음악 작업에 팔을 걷어붙이는 데 도움이 됐다. 김창훈은 새 앨범에 실릴 다섯 곡은 이미 완성했다. 그는 ‘흑석동’과 ‘어머니’에 이어 ‘너 없는 나’, ‘사운드 오브 러브’와 ‘아버지’ 등을 7~9월 사이 한 곡씩 추가로 공개한다. 앞서 공개한 신곡 5곡과 미 발표곡 5곡을 묶어 정규 앨범으로 내는 방식이다.
그의 새 앨범에는 발라드부터 록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실린다. 그가 휴대전화로 들려준 미발표 곡 ‘절규’는 강렬한 기타 사운드가 돋보였다. 김창훈은 산울림 시절부터 대중성과 록 밴드의 날 선 음악을 자유롭게 오간 작곡가였다. 산울림에서도 김창훈이 만든 곡은 극과 극이다. 쓸쓸한 발라드곡 ‘회상’이나 동요 ‘산할아버지’를 만들었다가, 헤비메틀 밴드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강렬한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 같은 곡을 내놓을 정도로 그의 작업은 다양했다. 김창훈은 “추억에만 매몰되는 걸 가장 경계한다”며 “후배 음악인들에게도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앨범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산울림이 세상에 나온 지 꼭 40년이 된다. 아이유 장범준 등 가수를 비롯해 21세기를 사는 청춘들이 30~40년 전 노래들을 유적 발굴하듯 찾아 들으며 산울림의 음악을 재조명하고 있다. 전자음악이 판을 치며 사라진 음악의 서정성과 노랫말의 시적 여운을 그들의 음악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김창훈에게 이번 앨범 작업은 의미가 크다.
“새 앨범은 제 솔로 앨범이지만 제 음악은 산울림의 지류죠. 산울림의 음악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바람도 컸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할까요? 산울림 멤버로서 사명감을 갖고 계속 음악적 비전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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