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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국보 1호 변경 논란

입력
2016.05.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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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의 전쟁 원인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거기선 옛날부터 달걀을 뾰족한 끝이 아니라 둥글고 넓은 쪽을 깨서 먹어왔다. 그런데 왕이 그렇게 하다가 손을 벤 후, ‘릴리풋 왕국’은 법을 바꿔 뾰족한 쪽으로만 달걀을 깨도록 강제했다. 뾰족한 쪽을 깨어 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처형을 당한 사람만도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민심이 이반했다. 그 틈을 타 여전히 넓은 쪽을 깨먹는 이웃 ‘블레푸스쿠 왕국’이 릴리풋 왕국의 반란세력과 힘을 합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

▦ 요컨대 달걀의 어느 쪽을 깨느냐를 두고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정치인이기도 했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갈등을 불필요하게 증폭시키는 맹목과 아집을 풍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8세기 풍자소설에나 등장하는 우화가 결코 아니다. ‘달걀 전쟁’은 현실 속에서, 그리고 지금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가열된 국보 1호 변경 논란 역시, 별로 타당성 없어 보이는 아집이 불필요한 갈등을 키운 예다.

▦ 국보 1호를 기존 숭례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지난 2005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씨가 교체를 시도했다가 문화재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됐고, 지난해에도 시민단체들이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통해 12만 명의 동의를 얻어 문화재청에 보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임의로 정한 숭례문은 국보 1호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데다, 화재 후 문화재적 가치도 많이 훼손됐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삼자는 얘기다.

▦ 국민 64.2%가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선호해도 문화재청 등은 여전히 변경에 반대한다. 문화재 지정번호는 서열을 나타내는 게 아닌 데다, 지정번호를 다 뜯어고치려면 약 450억원의 비용이 든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국보 1호에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면 굳이 변경에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또 비용도 숭례문과 훈민정음의 번호만 맞바꾸면 된다는 점에서 정부의 반대는 왠지 억지스럽다. 급기야 사단법인 ‘문화재제자리찾기’가 31일 국회에 입법청원까지 한다니, 일이 여기에 이르도록 정부가 굳이 변경에 반대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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