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
프란츠 베르펠 지음·윤선아 옮김
강 발행·232쪽·1만4,000원
이미 사용해 버린 최상급에 대한 후회가 몰려오는 책들이 있다. ‘영혼을 사로잡는’ ‘눈을 뗄 수 없는’ ‘심장을 옥죄는’ 따위의 표현들은 대체재도 남기지 않은 채 낭비되고 탕진됐다. 이제 와서 축어적인 원래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없는 셈 아닌가. 독일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1890~1945)의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는 바로 이런 난국에 처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일러 ‘배반의 서사’라고 말하면 주인공 레오니다스가 신분상승의 욕망 때문에 애인을 배반하고 아내를 속인 사실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외도와 불륜 때문에 이 소설이 배반의 서사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전 생애에 점철된 자기배반. ‘너’를 속이고 ‘그들’을 속이는 것은 그렇게까지는 역겹지 않다. 허위와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할 때조차 ‘나’를 속이는 자기기만과 배반,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는, 그리하여 존재의 기반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자기배반을 소설은 우아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작은 배반들의 축적이 어떻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거대한 참혹의 원인이 되는지를 슬프고도 예리하게 그려냄으로써 이 소설의 작가는 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세계를 보여주려는 모든 문학가의 야심을 실현했다. 잔혹할 정도로 집요하게 파헤친 심리묘사는 추악해서 애잔한 인물 위로 독자의 자아를 자꾸만 투영시키며 75년의 시차를 건너뛴다.
50세 생일을 갓 넘긴 오스트리아의 잘 생기고 매력 넘치는 교육부 차관 레오니다스는 아침 식사를 위해 앉은 식탁 위에 옅푸른색 잉크로 글씨를 쓴 편지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본다. 형식적인 공문서들과 함께 우편물 속에 섞인 그 편지는 아침이면 자신의 성공에 대한 만족감으로 눈을 뜨는 레오니다스의 낯빛을 순식간에 어둡게 물들인다. 가난한 라틴어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가 된 레오니다스는 우주란 “신들의 총아”를 위한 “하나의 거창한 행사”, 즉 자신처럼 매력과 재능이 넘치는 하층계급 출신을 “저 밑바닥에서 높은 곳으로 살살 끌어올려, 그들 손에 권력과 명예, 영광 그리고 호사를 쥐여주는 데 있다”고 믿는다.
대학 기숙사 옆방에서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한 이스라엘 친구가 남겨준 고급 연미복은 볼품없던 청년 레오니다스를 왈츠를 가장 잘 추는 매력 넘치는 관료로 탈바꿈시켰고, 세계 주요도시마다 백화점 지점을 거느린 오스트리아 최고 부자의 외동딸을 사로잡아 결혼하게 도왔다. 아내의 재산을 노린다는 의혹을 받지 않으려고 부부 재산을 분리한 채 자기 봉급만으로 살아갈 정도로 용의주도한 이 야심가는 남편에게 매력을 잃지 않기 위해 새 모이만큼만 식사를 하는, 아이를 낳지 않아 아직도 처녀 같은 부유한 아내와 20년의 부부생활을 성공적으로 유지해왔다. 하지만 옛 연인 베라의 편지는 모든 것을 뒤흔든다. 아내가 집을 비웠던 18년 전 레오니다스는 짧지만 격정적인 사랑 후 데리러 오겠다는 인사를 남긴 채 비겁하게 베라를 떠났고,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베라는 15년 만에 레오니다스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낸 것이다.
소설은 레오니다스가 자기배반과 강렬하게 마주하게 되는 10월의 어느 하루를 그린다. 이지적이고 이국적인 매력으로 레오니다스를 사로잡았던 베라는 철학교수가 되었고, 건조한 문체의 짧은 편지 속에서 18세 독일학생을 유대인 살해가 심각한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전학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유대인인 베라가 자신의 아들을 낳았음을 직감한 레오니다스는 아들의 존재에 순식간에 자기 안의 유대인 혐오를 내던지고 위험한 길을 선택하리라 결심한다. 지금껏 누려왔던 상류 생활의 안락함과 편리함, 사회적 지위와 명예, 아내의 사랑을 순식간에 잃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자신도 자신의 용기에 놀랄 정도로 결연하다.
하지만 위선과 허위의 가면은 일평생 쓰고 있는 동안 가면이 아닌 피부가 되었다. 베라를 다시 만나 “난 나 자신을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요…”라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영원히 용서했다.”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품위를 잃지 않으며 줄줄 뱉어내는 뱀의 말과 “자신의 소심함과 비열함이 너무도 역겨워 뱃속이 다 울렁거”리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곳, 인간 내면. 반유대주의는 바로 그곳, 햇빛과 바람이 통하지 않아 습한 그곳에서 발아했다. 소설은 작품 속 인물도, 독자도 매끈한 솜씨로 속여넘기는 서술의 배반으로 이야기를 미처 짐작하지 못한 곳으로 끌고 가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학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독자를 가격한다.
독일의 표현주의 시인으로 릴케에게 “다음 세대를 이끌 위대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프란츠 베르펠은 작곡가 구스타프 밀러의 아내이자 화가 클림트, 코코슈카 등을 사로잡았던 ‘빈의 뮤즈’ 알러 말러와 결혼해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했다. 그 자신 유대인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1940년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규탄하지 않고 관찰하는 어조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관철됐다는 점이 놀랍다. 아내 알마의 격려가 없었다면 시인으로 생을 끝냈을 것이라는 베르켈은 오델로 작곡 과정을 그린 ‘베르디. 오페라 소설’과 여러 차례 영화화된 희곡 ‘얔봅스키와 대령’으로 유명하다.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는 망명 직후인 1941년 발표한 소설로 국내 초역됐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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