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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여혐을 ‘문신’한 여자

입력
2016.05.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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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정새난슬. 팔에 새겨진 문신이 화려하다. 뱀 문신도 몸에 새긴 그는 "동화책을 써 보고 싶다"고 했다.
싱어송라이터 정새난슬. 팔에 새겨진 문신이 화려하다. 뱀 문신도 몸에 새긴 그는 "동화책을 써 보고 싶다"고 했다.

“한 번 볼래?” 이달 중순께 문화부에서 출판을 담당하는 선배가 책 한 권을 건네줬습니다. 제목이 ‘다 큰 여자’란 책이었습니다. ‘문제적 여자의 파란만장 멘탈 성장기’란 부제가 달렸더군요. 첫 인상은 키치적이었습니다. 책 표지도 분홍색 바탕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케 하듯 여성의 두 팔과 손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어 엉뚱한 느낌을 줬으니까요. 서문은 ‘나는 몸에 타투가 많고…’라는 글로 시작하더군요. 목차를 보니 ‘나는 이혼한 여자다’가 첫 챕터의 주제였습니다. 여기까진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부제에서 적었듯 ‘별난 여자’가 쓴 별난 얘기가 아닐까 싶어서요. 세상에 별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러다 책 소개 자료 첫 줄을 보고 흥미가 돋았습니다. ‘가수 정태춘 박은옥의 딸이자….’

정태춘과 박은옥의 딸이 ‘몸에 타투가 많은’ 여성이라니요. 도통 연결이 안 됐습니다. 정태춘과 박은옥이 어떤 가수였습니까. 1970~80년대 ‘촛불’ ‘사랑하는 이에게’ 등 따뜻한 포크 음악으로 사랑 받고, 시적인 노랫말로 ‘노래하는 시인’이라 불렸던 이들입니다. 정태춘은 ‘우네’(1982)란 앨범에서 국악 반주를 사용해 한국 전통 음악의 활용에도 큰 관심을 보였지요. 이뿐이겠습니까. 두 사람은 8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초기의 낭만성을 뒤로하고 5집 ‘아 대한민국’(1990)을 시작으로 사회의 모순을 꼬집으며 ‘저항 가수’로 불렸습니다. 화려한 무대나 TV가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 현장에서 더 자주 볼 수 있었지요.

때문에 제가 정태춘과 박은옥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들은 ‘민중’과 ‘토속’이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딸이라면 개량 한복까진 아니더라도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한 여성이지 않을까 싶었지요. 그런데 웬걸, 책을 넘겨 보니 두 사람의 딸은 ‘여전사’에 가까웠습니다. ‘막 이혼했어요’란 문구가 적힌 사진에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섬길 법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진 양 팔을 자랑하듯 벌리고 있었습니다.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박힌 검정색 민소매 옷을 입은 채로요. 쇼트 커트 머리의 그는 펑크밴드의 멤버 같았습니다. 한 눈에 봐도 도발적인 기운이 강했습니다. 정태춘·박은옥 부부에게 어떻게 이런 딸이…. ‘못 된’ 선입견에서 비롯된 호기심으로 그와의 인터뷰 일정을 잡았습니다. 정태춘·박은옥은 문신을 즐기는 딸을 가만히 놔뒀을까? 한 두 개도 아니고 왜 이렇게 문신을 많이 하게 된 걸까? 이 궁금증에서 만난 사람이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싱어송라이터이고 글 쓰는 게 취미라는 정새난슬(35)이었습니다.

정새난슬은 가수 정태춘(오른쪽)의 딸이다. 아버지는 최근 딸의 북콘서트에 가 딸과 노래를 불렀다.
정새난슬은 가수 정태춘(오른쪽)의 딸이다. 아버지는 최근 딸의 북콘서트에 가 딸과 노래를 불렀다.

직접 만나보니 진짜 문신이 가장 먼저 들어오더군요. 긴 셔츠를 입고 왔지만, 오른손 팔목과 왼손 검지부터 약지까지 세 손가락 마디에 다 ‘그림’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난해 이혼한 남편이 네 번째 손가락에 새겨준 다이아몬드 문양이 보기 싫어 다른 손가락에도 문신을 새겼다네요. 문신을 몇 개나 몸에 새겼냐고 물으니 “적어도 15개는 될 것”이랍니다.

처음엔 ‘껌 좀 씹던 언니’라 그런 줄 알았습니다. ‘불량 학생’이었을 거라 짐작하고 학창 시절에 대해 묻자 “완전 평범했다”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던 건 아니지만, “학교가 좋았고 특히 도서관이 좋았다”더군요. 고 커트 코베인이 활동했던 미국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의 음악을 좋아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취미도 없었고요. 그가 처음 문신을 한 건 스물 여섯 때라고 합니다. ‘Fire walk with me’란 글귀를 허리에 새겼죠.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치가 만든 드라마 ‘트윈픽스’(1992)의 부제였죠.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라니…. 처음엔 순전히 문화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문신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혹당하는 것보다 유혹하는 여성이 되고 싶은 쪽이었습니다. 청순함보다는 ‘음기롭게’ 건방진 여성으로 살고 싶었다고요. 강인한 여성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문신으로 표현한 거죠.

낭만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미친 거 아냐?” “쯧쯧쯧”. 문신을 하고 나니 주위에서 비난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비수를 꽂았던 건 “저래서 시집이나 가겠니?”란 말이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새난슬씨는 몸에 문신을 한 남성과 사귀던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사람들이 문신한 그를 불편해하며 피하긴 했어도, “장가나 가겠어?”라는 공격적인 말을 퍼붓는 건 한 번도 듣지 못했으니까요. 억울했고, 공포스러웠습니다. ‘문신한 여성’에 대한 혐오를 느낀 순간이었으니까요. 새난슬씨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뱀 문신이 있습니다. 그는 “뱀이 지닌 이미지가 저항적이고, 내가 느낀 사회적 편견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 뱀 문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문신을 한 여성에 대한 혐오에 대한 혐오로 자신의 몸에 뱀을 새긴 겁니다. 이와 관련해 새난슬씨가 책에 쓴 글이 인상 깊었습니다.

“내 나름의 멋을 부렸다고 경험한 폭력적인 발언과 시선, 그것들은 내게 정치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 대중매체는 팜므파탈에 대한 이미지를 소비하고, 젊은 여성들의 성을 직간접적으로 팔며 자본으로 격려한다. 그러면서 정작 개인이 성적·문화적 주체로 나서서 자신을 정의하고 표현하려 들면 정색을 한다. 특히나 급진적이고 그들이 제시하는 프레임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쉽게 비난하고, 심지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유학 다녀온 여자들의 점수를 깎듯이, 젊은 여성이 문신을 새기는 일 자체를 장차 어머니가 될 몸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긴다.”

이런 그를 부모님도 처음부터 쉽게 이해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새난슬씨가 문신을 한 걸 안 부모님은 “서로를 이해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만나지 말자”고 했답니다. “우린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겠니”란 걱정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 부녀의 문신을 둘러싼 갈등은 일주일 만에 해결이 났습니다. 비교적 빨리 그의 부모님이 딸의 취향을 존중해준 것이죠. 새난슬씨는 지난해 이혼을 했습니다.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뱀 문신을 한 이혼녀 딸과 함께 지내며 손녀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이혼하고 진정한 공동육아를 경험하고 있다”며 쑥스럽게 웃었습니다. 직접 만난 새난슬씨는 상냥했고, 말을 참 조리있게 했습니다.

숨겨진 1mm: 새난슬씨는 책과 함께 ‘다 큰 여자’란 앨범도 최근 냈습니다. 이 앨범에선 그의 ‘문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저항과 공격적인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위기가 살짝 어둡긴 해도, 오히려 ‘청순’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수록곡 ‘오직 당신’을 듣다 보면 가수 남궁옥분이 떠오릅니다. 실로폰 소리에 맞춰 유리구슬이 구르듯 투명하게 노래하는 모습이 반전입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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