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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4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입력
2016.05.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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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 너 때문에 죽겠다! 너 정말 왜이래? 꾸리꾸리하게 살려고 그래?" (엄마)

영화 '4등'은 나가는 대회마다 4등만 하는 초등학생 수영선수 준호를 향한 엄마의 집착(정신적 폭력)과 코치의 체벌(신체적 폭력)을 핵심 주제로 다룬다. 엄마는 '만년 4등'인 준호를 보며 안달한다. 메달권 밖으로 뒤처지면 '구린 삶'을 살게 된다는 불안 때문이다.

4등이었던 준호가 '거의 1등'에 가까운 2등을 하게 된 건 때려가며 가르치는 코치를 만나면서다. "1등을 하면 무엇이 좋으냐"고 천진난만하게 묻던 아이는 "내가 집중을 못해서 (1등을 못하니) 매를 맞는 것"이라고 수긍한다. "때려서라도 잡아주는 선생이 진짜"라고 말하는 코치와 "체벌의 상처는 메달로 가려질 수 있다"고 믿는 엄마. 아이는 “맞으면서 하고 싶지 않다”며 좋아하던 수영을 그만둔다.

영화 속 엄마의 말처럼 경쟁에서 밀려나는 건 곧 인생의 패배를 의미하는 걸까. 성공과 행복의 크기는 비례하는 걸까. 우리사회에 만연한 1등 지상주의 그늘을 돌아봤다.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성적=인생등급?” 사교육 열기로

성적순으로 등급이 나뉘는 건 아이들에게 일상이다. 일반반과 심화반, 일반중과 국제중, 일반고와 자사고·특목고, 수능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건 익숙하다. 그리고 이 성적이 곧 인생의 등급으로 이어진다는 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지배 구조다.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열망은 사교육으로 이어진다. 지난 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6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초등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80.7%다. 중학생은 69.4%, 고등학생은 50.2%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참여율은 줄었지만, 지출하는 돈은 늘어났다. 사교육에 참여한 초등학생 1인당 월평균 비용은 28만6,000원, 중학생은 39만7,000원, 고등학생은 47만1,000원이다.

여전히 국어, 영어, 수학 중심의 사교육이 강세지만 입시전형이 다양화 하면서 자녀의 적성과 재능을 고려한 예체능 관련 과목도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아이돌, 스포츠스타 등 성공 모델에 체계화된 교육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 보컬 학원에 가고 수영 강습을 받는 식이다. 실제로 일반 과목의 사교육비는 다소 줄었지만 예체능 과목의 지출은 4년 째 증가했다. (▶통계보기)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경쟁에 치인 아이들 "행복하지 않아"

아이들의 시간은 오롯이 공부를 위해 쓰이고 있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만 10세 이상)의 하루 평균 학습시간은 5시간24분으로 4시간30분인 대학생보다 한 시간 가량 많았다. 반면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주 적다. 이주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문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OECD 아동복지지표를 통해 본 아동의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이가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하루 48분으로, OECD 회원국 중 20개국의 평균 150분에 크게 못 미쳤다. 이 연구원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교육에 투자할수록 아동의 현재 정신건강과 삶의 질은 하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보기)

경쟁에 치인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아우성이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염유식 교수팀이 발표한 '2016 제8차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연구'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82점으로 조사 대상인 OECD 회원국 22개국 중 가장 낮았다. 삶의 만족도는 성적보다는 부모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영향을 미쳤다. 성적이 똑같이 '중(中)'에 해당할 때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으면 47.7%가 삶에 만족했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좋은 경우 75.6%가 삶에 만족하다고 답했다.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경쟁은 왜 계속되는가

부모세대도 성적 경쟁에 짓눌린 아이들이 가엾지만, 이미 시작된 경주에서 내 아이만 하차시키는 선택은 쉽지 않다. 여론조사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지난해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 95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사교육에 관한 전반적 인식을 물었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엄마들은 "교육 때문에 시달리는 자녀가 안쓰럽다(77.2%)"면서도 "사교육을 하지 않으면 공교육을 따라가기가 어렵다(66.8%)",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기 위해선 사교육이 필요하다(63.8%)"고 답했다. 엄마들의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대답은 "사교육 열풍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것 같진 않다(85.9%)" 였다. (중복응답 가능)

아이도 행복하지 않고 부모도 행복하지 않은 경주는 왜 계속되는 걸까. 김상범 중앙대 체육학과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연 좌담회에서 경쟁을 강요하는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김 교수는 “국가 입장에서 보면 그 경쟁 시스템이 메가 이벤트다. 전국체육대회를 예를 들어보면 도시마다 개최하면서 도시 인프라가 생기고 수익이 나고 정치적인 홍보를 하는 데 아주 효율적이다. 그러니 그게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사보기)

성적표 너머의 삶을 설계하라

'4등'은 실패를 의미하기도 희망을 의미하기도 하는 등수다. 조금만 노력하면 제도권이 인정하는 '1,2,3등'에 들어올 수 있다는 희망고문에 해당하는 성적인 탓이다. 때문에 1등만이 답이라고 믿는 사회에선 '4등'은 폭력을 써서라도 더 높은 성적을 받아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선 사회적 성취수단이 다양해지고 있다. 지금처럼 1등을 위한 공부만이 정답이 아니란 얘기다. 최근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공부의 배신'의 메시지처럼 ‘교육이 곧 계층이동 사다리’라는 한국적 신화는 이미 균열이 가고 있다.

사회학자인 엄기호 덕성여대 교수와 정신과 전문의인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도 최근 발간한 저서 '공부중독'에서 우리사회의 과도한 교육 열기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다. 한국사회의 성공 판타지가 투영된 교육열이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얻겠다는 삶에 매몰되게 만들었고,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진단이다.

엄 교수는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면서 지금처럼 삶을 기계적으로 만드는 공부를 버리고 지혜와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가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공부가 매뉴얼화되고, 삶도 덩달아 매뉴얼화되는 획일주의를 지양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자식의 성적표를 부모의 성적표로 오인하는 태도도 버려야 할 때다. 하 교수는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가 대학에 갈 때, 취업할 때, 결혼할 때마다 자신의 성적표를 받는다고 여기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추격매수를 그만두고 손절매다 싶더라도 털고 나와야 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 교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해볼 수 있는 용기와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현재의 제도에서 벗어나도 나름의 방식으로 잘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그런 믿음 체계의 집단적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영화 '4등' 스틸컷. 프레인글로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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