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처 ‘혐의 있음’이 전원회의서 ‘혐의 없음’ 으로
면세점 환율 조작 등 혐의 인정돼도 ‘솜방망이’ 제재
결혼비용 줄이기ㆍ노쇼근절 등 엉뚱한 캠페인엔 앞장
전문가들 “친시장ㆍ친기업은 달라… 중립ㆍ독립성 유지를”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제 역할은 소홀히 한 채 부차적인 업무에만 힘을 쏟는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담합 단속 및 시장지배력 남용 감시 등 본연의 업무에서 예전만큼 날을 세우지 못하면서, 정작 민간에서나 해야 할 캠페인 등에 조직 역량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핵심업무엔 ‘무딘 칼날’
최근 공정위는 각종 사건에서 소극적 태도나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공정위는 사회적 이목이 집중됐던 담합이나 계열사 부당지원 건에서 잇달아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25일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이후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 부당지원, 골프존 가격담합, KT 계열사 부당지원, 오라클 끼워팔기 등에서 잇따라 무혐의 결정을 했고 대형마트 명절선물세트 가격담합에 대해서는 심의절차를 그대로 종료하며 사실상 무혐의 결론을 냈다. 대부분 사무처(검찰 역할)가 ‘혐의 있다’고 판단한 것을 전원회의(법원 역할)가 ‘혐의 없음’으로 뒤집은 경우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사건에서도 제재 수위는 높지 않다. 이달 초 공정위는 주요 면세점들이 2007~2012년 환율을 조작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과징금 없이 시정명령만 내렸다.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 합병에서 발생한 순환출자 금지 위반에 대해서도 19일 “위반 정도가 경미하다”며 경고에 그쳤다. 법원에서 잇따라 패소를 하자 공정위 스스로 지나치게 몸 사리기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건 처리가 차일피일 늦춰지는 것도 문제다.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합병 타당성을 검토하는 심사는 기업결합 심사 기한(최장 120일)을 훌쩍 넘겨 이날 현재 177일째가 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공정위는 “자료 보정 기간은 심사기간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기한을 넘겼다고 볼 수 없다”며 “과거 동종 심사에서 1년 이상 걸린 사례가 다수 있었고, 이번 건은 국내 최초의 통신ㆍ방송 결합 사건이라 단순 비교가 쉽지 않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업계 일각에서는 “공정위 소신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윗선의 눈치를 보느라 늦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않고 있다.
엄정한 법집행기관으로서의 권위를 공정위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10월 공정위는 ‘사건처리 3.0’ 대책에서 조사를 받는 피조사자(주로 기업)의 권익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갑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열중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현 위원장 취임 후 법 해석과 집행에 관한 부분이 너무 무뎌졌다”고 비판했다.
비주력 업무엔 ‘역량 집중’
조직의 본령과 관련한 업무에서 전문가의 박한 평가를 받는 공정위는 최근 주업무가 아닌 일을 역점 과제로 제시해 대조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24일 “비정상의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며 ▦고비용 혼례문화 개선 ▦의료기관 불법행위 근절 ▦TV 홈쇼핑 불합리한 관행 근절을 3대 중점 과제로 꼽았다. 특히 고비용 혼례문화 개선은 합리적 결혼문화를 홍보하겠다는 것이 주요 대책이다.
계몽성 캠페인에 대한 애정은 예약부도(노쇼) 근절 캠페인에 적극 나서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노쇼 근절이 필요하다고 해도 굳이 민간에서 할 일을 시장감독기관이 나서서 하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신광식 연세대 겸임교수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기관이 이런 캠페인을 한다는 것은 코미디”라고 평가했고, 박상인 교수는 “공정위가 본업에 충실하는 게 바로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꼬집었다.
공정위가 지금처럼 ‘친기업’과 ‘친시장’을 혼동하며 정권 핵심가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 이런 논란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시절 공정위는 ‘물가당국’을 자처하며 정부 차원 물가안정 대책에 적극 나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김상조 교수는 “공정위를 독임제(수장 한 사람이 권한을 가지는 것)가 아니라 합의제(합의체가 의사결정권한을 가지는 것) 위원회로 만든 것은 견제와 감시 및 다양성을 추구하라는 취지”라며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기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임명권자 의중만 바라보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세종=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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