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중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근교의 김병화박물관. ‘이중사회주의로력영웅’이라고 새겨진 김병화(1905∼1974) 선생의 흉상 앞에서 한국인 여행객 10여 명이 70대 중반인 장에밀리아 박물관장의 목소리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김병화 선생은 1940년부터 35년간 구 소련 집단농장의 농장주로 일하면서 두 번이나 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수도로 불리는 타슈켄트에서 드디어 고려인을 만났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도 중앙아시아는 KTX시대의 촌동네 간이역처럼 그냥 스쳐갔던 곳이고, 우리 역사의 아픔인 고려인 문제도 제대로 짚어본 적이 없던 터라 이날 만남은 각별했다.
머나먼 중앙아시아에 한국인의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뿌듯했다. 구 소련 우즈벡공화국에서 노력훈장을 탄 650명 중 139명이 고려인이고, 김병화 콜호즈에서만 24명이 받았다. 금별훈장을 두 번이나 탄 이중영웅 4명 중 한 명이 고려인, 바로 김병화였다.
“남편 성을 따랐다”는 남원 태씨 출신의 장 관장은 김병화 선생의 사돈이라고 했다. 카자흐스탄 세미팔라친스크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1991년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던 때부터 20여 년째 매년 30여 명의 청소년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려인이 한국말을 모르면 안되지.”
장 관장을 향한 고려인들의 애정을 확인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한때 박물관 측이 장 관장 대신 다른 인물을 관장으로 앉힌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타슈켄트에서 활동하는 15개 한국 관련 여행사의 고려인 여행가이드 12명이 이에 항의해 한 명의 여행객도 이 박물관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김병화 선생과 장에밀리아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달 후 장 관장이 다시 박물관을 맡게 됐다고 한다.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 박물관 안 김병화 선생의 대형 초상화 옆 문구를 보면서 나라 잃은 설움이 전이됐다. 새로운 조국이란 구 소련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연해주에서 이곳으로 강제이주된 선생에게 옛 조국은 어떤 존재였을까. 고려인들을 머나먼 중앙아시아 땅으로 내몬 원죄는 옛 조국에 있다.
뽕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쿠일룩 재래시장에도 고려인 2, 3세들이 많았다. 북한식 김치와 장류, 야채가 주된 판매 식품이었다. 부추와 고추, 절인 무 등을 팔던 70대 초반의 고려인 2세 할머니는 “내가 광주 이가인데, 1997년 여동생이 살고 있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너무 좋아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반갑소”라고 되뇌었다. “한국을 보기 전에는 북한만 모국으로 알고 있었다”는 그는 같은 또래의 한국 할머니들과는 오랜 친구처럼 손을 맞잡았다.
마흔 안팎의 여행가이드 김스타스씨도 고려인 3세였다. “어머니 당부도 있었고, 결혼 후에도 한국 음식을 계속 먹고 싶어 고려인과 결혼했다”는 그의 두 딸은 고려인 4세다. 나라잃은 고려인이 이제 4세까지 내려왔지만 우리 역사에는 아직 사각지대다.
그에 따르면 한때 30만 명 가까이 됐던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이제 20만 명도 되지 않는다. 1991년 독립 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인근 국가와의 교역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 소련 시절에는 고려인 중에도 부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져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많이 이민 갑니다.”
고려인의 비극은 1937년 구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최고조에 달한다. 18만 명의 극동 한인들이 조국과 가까운 연해주도 모자라 낯선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것은 사실 민족의 아픔이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우리나라 해외동포 중 가장 많이 잊혀진 핏줄이기도 하다. 1937년 9월 초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고려인 수송열차가 원동을 떠나 9월 말쯤 카자흐스탄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농촌 벽지로 고려인을 흩어놓았다. 자치주 설립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했다.
고려인들은 건조한 반사막지대와 갈대밭 지역에 짐을 풀었다. 학력과 경력, 희망사항과는 관계없이 고된 육체노동 현장에 투입됐다. 토굴, 마구간, 돼지 우리, 창고, 옛 감옥 등이 임시거처로 사용됐다.
강제이주 첫 겨울동안 노인과 영아 대부분이 숨졌다. 고려인 생존자 중 1935∼38년생이 아주 드문 것은 바로 강제이주의 후유증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정치적 탄압과 차별대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행정적 이주민’이었으나 거주이탈 자유를 박탈당했고, 공민증도 회수당했다.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철도에서 먼 곳으로 이주됐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정착지 고려인 수를 1,000가구 밑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비밀경찰의 엄중한 통제로 죄수 아닌 죄수 생활을 해야 했다. 이같은 생활은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16년간 이어졌다.
가혹한 통제는 끝났지만 고려인은 정착할 수 없었다. 자유여행이 허용된 후 고려인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으로 빠져나갔다. 도시에 정착하면 어김없이 콜호즈의 친인척을 불렀다.
여기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10만 명의 고려인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우크라이나, 남부 러시아, 북캅카스 지역이 새로운 생활권역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부터는 우리나라로 취업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려인 사회는 1991년 1월1일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제호를 ‘고려일보’로 바꿨다. 소련인으로 살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심정적으로 동조, ‘조선’이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고려인들이 민족 이름에서 ‘한국’과 ‘조선’을 동시에 배제한 것이다. 분단된 조국은 지금도 고려인들의 정체성에 고민과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의 분포를 보면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 각 17만여 명,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키르키즈스탄에 1만7,000여 명, 우크라이나 1만2,000여 명, 투르크메니스탄 1,000여 명, 타지키스탄 600여 명, 벨라루스 1,200여 명 등 모두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모두 우리 동포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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