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에 휘둘리는 정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유승민에
친박 “자기 정치 한다” 찍어내기
野는 친노 vs 비노 노선 갈등
비주류 중도 목소리는 무시 당해
국민의당계파분류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멍에로 꼽히는 것은 보스 중심의 ‘계파(系派)정치’다. 3김 시대의 동교동ㆍ상도동계 정치와 달리, 철학과 정책의 지향점을 공유하는 정파(政派) 성격은 사라지고 보스의 이해관계에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파당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많다. 보스의 이해와 어긋나는 개별 정치인의 소신은 배신으로 낙인 찍히고 협치(協治)의 시도도 의심받는다. 20대 국회가 ‘무생물 국회’의 오명을 벗기 위해선 계파정치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새누리당에서 계파 정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뚫기 위해 영입한 박근혜 대통령이 당권을 잡은 2005년 이후라는 게 당내 중론이다. 두 번의 대선에서 패한 이후 느슨한 정파 형태로 구성돼 있던 새누리당 내에서 강력한 대권 유력주자인 박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보스 중심의 이합집산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친박계’의 등장은 반작용으로 ‘친이계’라는 또 다른 계파를 불렀다. 친박ㆍ친이계는 강한 지지층의 응집력으로 두 번의 집권을 일궈내는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10여 년에 걸친 대립은 결국 당내 다양성의 토양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두 보스 이후 차기 주자가 보이지 않아 재집권 전망이 흐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무소속 유승민 의원이 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질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계파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생산적인 노선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표적 예가 유승민 의원이 지난해 원대대표 자격으로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저출산ㆍ고령화로 복지수요가 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정 확보 방안이나 복지 지출은 국민적 토론이 필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박 대통령의 원칙에 발목 잡히는 바람에 정책적 논의는 사라진 채, 계파간 정치공학적 논쟁만 들끓었다. 친박계는 “유 의원이 차기 대선 주자로 발돋움 하기 위해 박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이라며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고, 비박계는 친박계를 향해 “대통령 심기경호”라고 반발했다. 이 논란은 박 대통령의‘배신의 정치’ 언급을 거쳐 ‘찍어내기 공천’파동으로 이어져 결국 4ㆍ13 총선 패배로 직결됐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한마디로 정치는 내쳐지고, 정권을 경호하는 세력만 여권에 남고 있다”고 꼬집었다.

생산적인 노선 토론이 사라진 것은 야권도 마찬가지다. 외견상 친노 대 비노가 진보 대 중도간 노선 갈등을 빚어왔으나 속내는 계파 명분을 위해 구태의연한 노선에 기대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대표적인 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승계 방식이다. 변화하는 남북 관계와 국제정치 역학 구도를 고려해 충분한 토론이 필요한 사안이지만, 주류 계파는 “햇볕정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비주류 측의 의견만 나오면 “당론ㆍ민주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새누리당 2중대적 발상”이라며 논의 자체를 거부해왔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지난 2월 햇볕정책 수정ㆍ보완 발언을 내놓았지만 주류 계파의 성토로 ‘설화(舌禍)’ 취급 받으며 뉴스에서 사라졌다. 국민의당도 ‘개혁보수’ 세력으로 분류되는 이상돈 당선자가 햇볕정책 수정론을 내놨으나, 당내 호남 세력에 밀려 공론화되지 못했다. 야권은 여당과 각을 세우고 있는 쟁점 법안에 대해서도 소수 의견을 무시해 왔다.

최운열 더민주 당선자는 지난달 20일 당선자대회에서 “고용을 늘리는 방법은 의료 등을 포함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활성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론에 배치되는 소리”라는 쓴소리만 들었다. 당의 외연을 중도로 확장하기 위해 영입한 인사의 문제 제기가 주류 계파가 설정한 당론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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