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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진가 알린 풀러렌 발견 “과학자에게 대담해질 때를 아는 건 중요”

입력
2016.05.21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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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크로토는 나노과학을 가능하게 한 물질이라 불리는 ‘풀러렌’을 발견한 공로로 1996년 노벨상을 탔다. 빼어난 과학자들이 대개 그랬듯, 그는 자신의 트랙을 달리는 한편 과학의 트랙 자체를 닦는 데에도 맹렬히 헌신했다. 그는 스스로 추구한 과학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인류를 구원할 길이 있으리라 여겼다. 위키피디아.
해리 크로토는 나노과학을 가능하게 한 물질이라 불리는 ‘풀러렌’을 발견한 공로로 1996년 노벨상을 탔다. 빼어난 과학자들이 대개 그랬듯, 그는 자신의 트랙을 달리는 한편 과학의 트랙 자체를 닦는 데에도 맹렬히 헌신했다. 그는 스스로 추구한 과학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인류를 구원할 길이 있으리라 여겼다. 위키피디아.

1996년 노벨 화학상 수상

다이아보다 가벼운 풀러렌

의약품 등 활용 분야 무한

나노과학의 시발점 돼

대담한 가설로 주목

“너무나 아름다운 가정”

축구공 구조ㆍ우주 대기 가설

뒤에 과학계서 실제로 입증

英 기초과학 푸대접에 저항

정부의 후속연구 지원금 거부

화학과 폐지 대학에 학위 반납

말년엔 ‘과학적 사고’ 전파까지

이과생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는 ‘풀러렌(Fullerene)’이란 게 있다. 순수 탄소(C) 화합물로는 흑연과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약 30년 전에야 인류에게 제 존재를 드러낸 동소체. 탄소 원자 60개가 결합해 화학기호도 ‘C60’이다. 풀러렌이 그렇게 유명해진 건, 다이아몬드만큼 강하면서 더 가볍고 안정적인 데다 열ㆍ전기 전도성도 뛰어나 물리 화학 천문ㆍ항공우주ㆍ의약학 등 분야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 때문이다. 풀러렌의 발견과 더불어 나노과학(기술)이 시작됐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풀러렌, 하면 이과생은 거의 본능적으로 축구공을 떠올린다고 한다. 풀러렌의 탄소 원자가 결합한 방식이 영락없는 축구공 형태, 즉 오각형 가죽 12개와 육각형 20개가 맞붙은 60개 꼭지점마다 탄소 원자가 하나씩 놓여 서로를 붙잡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러렌이란 말을 들어본 이도 드물 거라는 문과생이 축구공을 보며 마라도나의 멋진 드리블이나 베컴의 환상적 프리킥을 떠올릴 때, 이과생은 풀러렌에서 비롯된 거대한 과학적ㆍ문명사적 진전과 가능성에까지 생각이 미칠지 모른다. 문-이과생의 차이를 논(?)하는 수많은 우스개들이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문과생에 대한 이과생의 ‘과학적’우월감을 내장하는 것은, (자연)과학적 사고로 훈련된 이과생의 눈에 멋모르고 젠체하는 세상 꼴이 조금은 같잖기도 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 자연대 화학과 학부 밴드 ‘풀러렌’의 기타리스트조차 1985년 풀러렌을 처음 발견하고 1996년 노벨 화학상을 탄 세 과학자-해리 크로토(Harry Kroto), 릭 스몰리(Rick Smalley), 로버트 컬(Robert Curl)의 이름까지 기억하지는 않는다. 풀러렌 이후, 그 실험을 주도한 해리 크로토가 과학 자체의 살을 찌우고 과학이 세상으로부터 온당한 대접을 받도록 하는 데 헌신했던 것을 기억하는 이는 더 적을 듯하다. 영국의 화학자 해롤드 크로토가 지난 4월 30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크로토의 아버지는 1900년 폴란드에 태어나 베를린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1937년 나치가 집권하자 영국으로 피신했다. 2년 뒤 2차대전이 터지면서 영국 정부는 적성국가 출신인 아버지를 맨섬(Isle of Man)에 억류했고, 만삭의 어머니는 캠브리지셔의 작은 마을 위스베치(Wisbech)로 강제 이주시켰다.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1939년 10월 7일, 위스베치에서 크로토가 태어났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풀려난 아버지는 영국 면방직산업의 중심지였다가 쇠락해가던 잉글랜드 볼턴 시로 솔가했다. 무일푼이던 아버지는 공구제조 기술자로 돈을 모아 55년 작은 풍선공장을 차렸다. 베를린 시절 하던 일이었다. 크로토는 볼턴서 성장했다. 노벨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자서(自敍)

에서 크로토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사연과 거기 얽힌 유년의 기억을 소개했다. 원래 그의 이름은 부계의 기원인 폴란드 실레시아(Silesia)의 흔적을 담은 ‘크로토시너(Krotshiner)’였는데, 55년 아버지가 개명해 ‘크로토’가 됐고, 그 뒤로는 일본계로 오인 받곤 했다는 이야기. 또래의 전형적인 랭카셔 이름들 사이에서 이상한 이름 탓에 외계인 취급을 받았고, 자신도 위축되곤 했다는 이야기. “다른 아이들과 최대한 다르게 보이지 않기 위해, 그 환경 속에 최대한 스며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노력했다는 걸 이제 깨닫는다.” 10대에 1차 대전을 겪고, 이어 대공황과 히틀러의 파시즘을 겪으며 2차례나 나라를 옮겨 다닌 뒤 낯선 곳에서 빈 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던 부모의 체험과 더불어, 저 유년의 기억은 그의 도저한 평화주의와 반차별의식, 집단 이데올로기의 구심력에 대한 근원적 저항감의 뿌리였다. 종교와 종교의 정치적 세력화에 대해 비판하며 그는 이렇게 자서에 썼다. “인종주의적 설교나 그와 관련된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애국주의, 그리고 종교적 맹신의 차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아이들의 장난감인 풍선이 그에게는 일거리였다. 작은 공장엔 늘 일손이 부족했고, 풍선 재료인 라텍스를 반죽하거나 염색하는 일, 기계를 고치고 옮기는 일 등에 그는 수시로 동원됐고, 1년에 두 차례씩 재고조사도 도맡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성가시고 힘들었던 그 경험이 훗날 과학자로서 문제를 발견하고 생각을 전개해 해법을 찾아가는 기술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됐노라고 말했다. 더 어려서는 조립완구인 ‘메카노(Meccano·소형 볼트 너트로 모형을 만드는 완구)’ 세트가 그의 유일한 장난감이었는데, 거기에 대면 레고 블록은 그야말로 시시한 장난감일 뿐이라고 말했다. “메카노는 진정한 엔지니어링키트여서,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과학자에게 필요한) 중요한 기술들- 섬세한 터치감각까지-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청소년기 그는 화학 물리 수학 외에도 미술(그래픽디자인)과 체육(테니스)에 관심이 많았지만, 교육열이 남달랐던 아버지의 숙제 감시 탓에 모두를 병행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고교 졸업반 화학교사(해리 히니 전 러프버러대 교수)의 영향으로 당시 화학과로는 영국 대학 중 최고였다는 셰필드대로 진학한다. 그의 예체능 재능은 남달랐던 듯하다. 학교 테니스 대표로 영국 대학체육협회(UAU) 주최 대회 결승전까지 두 차례 올랐고(자기 때문에 우승은 못했다고, 어쨌든 그는 말했다), 교내 (학생)체육위원회 회장도 지냈다. 그래픽 디자인 재능과 열정으로 교지 ‘Arrows’의 편집과 표지 디자인, 홍보 포스터 디자인을 도맡았고, 서섹스대 대학원 시절 ‘선데이타임스’ 디자인 경진대회(1964)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훗날 서섹스대 화학과 교수ㆍ연구 브로셔 ‘Chemistry at Sussex’표지 디자인은 최고의 전문그래픽 디자인 국제 연감인 ‘Modern Publicity’에 수록됐고, 2001년 노벨 화학상 기념우표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이름이야 어떻든, 잘생기고 기타 연주에도 능해 학생 포크클럽 멤버로도 활약했던 그는 63년 동창이던 마거릿 헨리에타 헌터(Margaret Henrietta Hunter)와 결혼했고, 64년 서섹스대에서 분광학(Spectroscopyㆍ 빛을 쏴서 물질이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스펙트럼으로 물질의 성질을 분석하는 학문으로, 물리와 분석화학,?천문학 분야에서 중요하게 이용된다고 한다) 관련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당시 분광학 분야의 메카였던 캐나다 오타와 국립연구위원회(NRC)에서 박사후과정 연구원으로 일했고, 66년 서섹스대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풀러렌의 탄소 원자 결합 형태. 탄소 동소체의 형태가 축구공과 같으리라는 크로토의 가설은 91년 입증됐다. 위키피디아.
풀러렌의 탄소 원자 결합 형태. 탄소 동소체의 형태가 축구공과 같으리라는 크로토의 가설은 91년 입증됐다. 위키피디아.

주기율표 6번의 탄소는 아주 가볍고 사교적인 원소로 우주와 뭇 생명의 근원이라고도 하지만, 풀러렌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순수한 탄소의 기본 형태로 흑연과 다이아몬드 외에 알지 못했다. 탄소의 진가가 더욱 빛을 발한 것도 풀러렌이 발견된 뒤부터였다. 성간 대기(먼지)의 성분, 특히 탄소 골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84년 그는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라이스대학을 찾아갔다. 레이저초음파 집적광선기를 그 곳 스몰리ㆍ컬 연구팀이 고안해 실리콘, 게르마늄 등 원소로 반도체 실험을 진행 중이라는 걸 안 직후였다. 85년 9월, 크로토의 제안으로 공동연구를 시작한 그들은 흑연에 레이저빔을 쏴서 기화시킨 뒤 남는 잔여물(숯)의 화학성분을 분석, 그 속에서 탄소 원자 60개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다.

훗날 크로토는 “과학자의 삶에서 대담해져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아는 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대담성의 결과가 새로운 탄소 동소체의 구조를 축구공과 흡사하리라 가정하는 거였다. 그가 아는 한, 60개의 원자가 가장 안정적으로 또 가장 아름답게 배열된 형태가 축구공이었다. 그는 C60에 ‘버크민스터 풀러렌(~렌은 복수형, 줄여서 풀러렌 혹은 버키볼이라 불린다)’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해 말 ‘네이처’ 지에 발표했다.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1895~1983)는 최소 자원을 소비해 최대의 공간을 최대한 아름답게 구현하자는 건축 미학으로 67년 몬트리올 엑스포의 미국관 돔 (측지학 돔ㆍgeodesic dome)을 건설해 세계를 놀라게 한 미국의 건축가였다. 새로운 탄소 동소체의 탄생에 과학계는 당연히 열광했지만, 결합 구조가 축구공 형태라는 가설에까지 선뜻 동조하지는 않았다. 크로토는 훗날 “나는 그게 너무 아름다운 가정이어서 옳을 수밖에 없다는 강한 직감(gut)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91년 물리학자 크레치머와 허프만이 X선 회절법 등을 통해 크로토의 ‘축구공’가설을 입증했다. 후속 연구를 통해 C70, C84 등 구체나 튜브 모양의 탄소 화합물이 더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풀러렌은 강철보다 100배나 강하면서 무게는 6분의 1에 불과해 재료혁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소재로 알려져 있다. 그 자체로 지름 1nm 미만의 최소 베어링이자 윤활제이고, 기억소자 등에 활용될 수 있는 초전도체다. 비어있는 속에 다른 원소나 물질을 삽입해 AIDS나 항암표적치료제 등의 캡슐 대체제로 활용될 가능성도 주목 받는다. 반도체의 집적 정도를 최대 1만 배까지 향상시킬 수도 있고, 수지에 첨가해 내구ㆍ내열성을 높이거나 정전기ㆍ잡음 차단 활용 연구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풀러렌의 양 끝을 열어 길게 이은 게 저 유명한 탄소 나노튜브다. 스웨덴 과학한림원은 “풀러렌의 발견은 화학과 물리학에 대한 기존의 지식과 생각을 확장시켰고, (…) 우주의 탄소 발생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우주의 성간 대기 속에 풀러렌이 무수히 존재하리라는 그의 또 하나의 가설은 지난해 스위스 바젤대 존 메이어(John Maier) 연구팀에 의해 입증됐다.(가디언, 2016.5.5) 그는 “생전에 그게 증명되리라곤 기대도 안 했다. 저 은하에 온통 축구공이 떠다니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느냐”며 ‘Chemistry World’ 비디오를 통해 기뻐했다고 한다.(뉴욕타임스, 2016.5.4)

친구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1941~)는 “크로토는 우주 어딘가에 만일 외계인이 있다면 그 생명체도 틀림없이 탄소화합물일 것이라고, 다른 어떤 원자도 탄소를 대신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도킨스는 “전복적 영혼과 아이의 호기심으로 충만한 학자”였다고 그를 추모했다.(가디언, 2016.5.2)

만년의 크로토는 전세계를 돌며 연 평균 70~80회씩 강연했다. 그는 과학교육, 특히 청소년 교육을 중시한 교육자였다. nobelprize.org
만년의 크로토는 전세계를 돌며 연 평균 70~80회씩 강연했다. 그는 과학교육, 특히 청소년 교육을 중시한 교육자였다. nobelprize.org

크로토는 ‘만들어진 신’같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도킨스 못지 않은 견결한 이신론자였다. 어린 시절 유대교 신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금식하던 어느 날, 어머니(비유대인)가 먹던 따듯한 크루아상의 유혹을 못 이겨 하나를 훔쳐먹곤 천벌을 각오하고 기다렸는데 아무 일도 없더라는 얘기를 하며 “(그 때부터) 아무 것도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렸다”고 노벨재단 자서에 썼다. “나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정권(regime)이 개인의 근원적 권리인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또 안전할 수 있는 자유를 막아 설 때마다 심한 반감을 느낀다. 나는 개인의 선 앞에 공동체의 선을 내세우는 그 어떤 주장에도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을 “국제사면위원회와 휴머니스트, 이신론자의 지지자다”라고 말했다.

크로토는 2003년 2월 15일 미ㆍ영의 이라크 침공에 앞서 영국의 노벨상 수상자 10여명이 발표한‘The Times’ 전쟁 반대 공동성명을 주도했고, 2010년 9월 베네딕트 16세 교황의 영국 국빈방문에 반대하며 가디언에 기고한 공개서한의 서명(54명)에도 앞장섰다. 그들은 가톨릭교회가 콘돔을 반대함으로써 가난한 나라의 입을 늘리고 AIDS 확산을 야기했고, 분리ㆍ차별 교육을 옹호하고, 낙태를 부정하고, 성소수자의 평등한 권리를 부인하는 점 등을 비판했다.(가디언 2010.9.15)

96년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기 불과 두 시간 전, 영국 정부는 그의 후속연구 예산 10만 파운드의 지원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려 망신 당한 일이 있었다. 수상 이후 그의 연구비 조달 여건은 물론 개선됐지만, 영국 교육ㆍ과학 당국과 대학의 기초과학 푸대접은 여전했다고 한다. 2004년 엑시터대가 화학과를 폐지하자 크로토는 앞서 받은 명예 학위를 반납하며 비판했다. 2007년 5월 가디언 기고에서는 그 즈음 5년 사이 영국 대학 물리학과의 30%가 폐과되거나 통폐합되고, 2006년 자신이 37년간 머물고 왕립학회 12명의 회원과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서섹스대 화학과마저 폐과하려 한 일 등을 상기하며 “만일 세상의 미래가 과학자의 손에 달려 있다면, 지난 10년 영국 정치의 안일함이 바뀌지 않는 한 그 해답이 영국에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 쓰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는 자신의 연구 못지않게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와 과학 교육 환경 개선에 열정을 쏟았다. 95년 BBC와 함께 ‘베가 사이언스 신탁 Vega Science Trust’을 설립, 중요한 과학적 연구와 발견, 주요 원리와 개념 등을 설명하는 영상 자료를 제작했다. ‘신탁’은 280여 편을 제작ㆍ방영하고 2012년 해산했다. 2009년에는 위키피디아 등을 모델로 한 국제 과학 공학 기술 교육자료 제공 사이트 ‘GeosetㆍGlobal Educational Outreach for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를 설립, 누구나 자료를 올리고 내려 받을 수 있게 했다. 2014년에는 아내 마거릿과 함께 전세계 11~18세 청소년들이 제작한 과학 공학 수학 교육 영상자료를 심사해 시상하는 ‘과학 기술의 창의적 활용 교육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한해 평균 70~80회 가량 강연하며 ‘자연과학적’ 사고와 인식의 중요성을 전도했다. “진실의 최대의 적은 부정한 의도로 만들어진 거짓이 아니라, 비현실적이면서도 집요하고 설득력 있는 신화”라는 케네디의 말, 또 중세 철학자 아벨라르(Abelard)의 “의심에서 시작해 탐구로, 탐구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등이 그의 강연 요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과학은 호기심과 재미로 해야지 상을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해선 안 된다는 것, “노벨상 수상자라고 예외적으로 지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는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근육이 경직 마비 약화하는 유전성질환인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으로 별세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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