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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윤상원의 부활

입력
2016.05.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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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국립 5ㆍ18 민주묘지에는 윤상원과 박기순의 합장 묘가 있다. 여덟 살 차이의 두 사람은 생전에는 가까운 선후배였지만 죽어서는 부부가 됐다. 윤상원의 묘는 원래 구 5ㆍ18 묘역에 있었고, 박기순의 묘와는 1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졸업 후 서울에서 주택은행에 다니다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1978년 고향으로 내려간 윤상원을 박기순이 자신이 속한 들불야학으로 오게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그러나 야학 활동으로 분주하던 그 해 12월 박기순은 연탄가스에 중독돼 스무 살로 생을 마감했다.

▦ 윤상원은 일기장에 이런 추모의 시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 / 왜 말 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그대는 정말 죽었는가…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 우리의 가슴 속에 피어난다.” 이 절절한 글을 읽으면 두 사람이 혹시 남녀의 감정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들은 친한 선후배이자 뜻을 같이한 동지였을 뿐 연인의 감정은 없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대답이다. 그렇게 박기순을 보낸 윤상원은 2년 뒤 1980년 5ㆍ18 시민군의 대변인이 돼 있었다.

▦ 윤상원은 그 해 5월26일 외신기자회견을 한 뒤 계엄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남도청에 있던 고교생들을 집으로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는 돌아가서 역사의 증인이 돼라.” 윤상원은 다음날 새벽 계엄군의 총에 숨졌다. 현장에 같이 있던 선배 김영철 등에게는 “천국에 가서라도 민주화 운동을 하자”는 유언을 남겼다. 김영철은 윤상원, 박기순 두 사람을 비롯해 박관현, 박용준, 박효선, 신영일 등과 함께 5ㆍ18 때 혹은 그 후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들불 7열사’의 한 사람이다.

▦ 다시 2년 뒤 딸의 영혼이라도 짝을 지어주고 싶다는 박기순 어머니의 바람이 윤상원과의 영혼결혼식으로 이어졌다. 전라도에는 결혼하지 못하고 숨진 넋의 짝을 맺어주는 풍습이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불꽃 같은 삶도 차차 잊혀졌다. 그러던 중 이번에 박승춘 보훈처장이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한 것이 거꾸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불렀다. 윤상원기념사업회 측은 “올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SNS로 주고받는 등 젊은이들의 관심이 유난히 뜨겁다”고 말했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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