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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민 밴드' 라디오헤드의 마력

입력
2016.05.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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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울게 할 음악’(Could make people cry). 여덟 살 된 영국 아이가 지난 8일(현지시간) 공개된 현지 유명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새 앨범에 실린 ‘트루 러브 웨이츠’ 를 듣고 내놓은 평이다. 이 곡은 라디오헤드가 2001년 공연에서 첫 선을 보인 미 발표곡으로 이번에 정식으로 녹음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아이의 평은 단순했지만, 곡의 핵심은 잘 짚었다. 피아노 한 대로 빚어낸 단출한 연주에 밴드의 보컬인 톰 요크 특유의 쓸쓸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팬들 사이 ‘밴드의 발라드곡’이라 불리며 사랑을 받은 노래다.

8세 아이가 쓴 라디오헤드의 9집 ‘어 문 셰이프트 풀’ 감상평이 국경을 뛰어 넘어 화제다. 런던에 사는 베스 고든이란 네티즌이 자신의 아이에게 라디오헤드의 새 앨범을 들려주고, 아이가 종이에 직접 쓴 수록 곡에 대한 평을 사진으로 찍은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쿵푸팬더가 생각난다’(‘더 넘버스’) 등 곡에 대한 아이의 풋풋한 시선이 흥미롭다. ‘지루하고 긴 노래’(‘데이 드림’)란 노골적인 평가를 보면 실소가 터진다. 새 앨범에 실린 곡 중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덴티키트’를 두고 ‘정말 별로’라고 촌평한 게 아쉽지만, 그 이유를 들어보니 공감도 된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 지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는데, 실제 요크가 흥얼거리듯 노래를 불러 가사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다. 9집은 라디오헤드 4집 ‘키드 에이’(2000)와 5집 ‘엠네지악’(2001) 시절 만든 미 발표곡이 여럿 실려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여덟 살 아이가 준 점수는 10점 만 점에 7점.

아이가 쓴 라디오헤드 새 앨범평이 사람들 사이 화제가 되는 건 이 밴드가 실험적인 그룹으로 정평이 나 있어서다. 국내에선 ‘크립’ 이란 노래로 유명한 라디오헤드는 ‘키드 에이’에서 몽환적인 전자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밴드 음악과 전자 음악의 경계를 지워왔다. 때론 번역을 뛰어 넘어 ‘독해’가 필요할 정도로 노랫말도 난해하다. 새 앨범에 실린 ‘글래스 아이즈’처럼 신경쇠약에 걸린 이가 웅얼거리듯 알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를 노래한 곡도 많다. 이처럼 실험적인 음악과 듣는 이가 난독증이 아닌가를 스스로 의심하게 하는 암호에 가까운 노래들을 여덟 살 된 아이가 단순하게 감상을 표현해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도 필요 없을 정도로 그녀는 날 매일 깨워줬다’며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한 팝스타 저스틴 비버 히트곡 ‘베이비’를 두고 이 아이가 감상 평을 내놓았다면 화제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음악의 혁신과 심오함은 소수의 열렬한 지지를 살 순 있어도,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는 어렵다. 하지만 라디오헤드는 영국에서 ‘국민 밴드’로 통한다. 대중적인 성공은 물론 평단에서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밴드라는 찬사를 받는다. 록밴드 뮤즈와 콜드플레이의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에는 미국에 너바나가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영국의 라디오헤드를 시대의 밴드로 꼽는 이도 많다. 라디오헤드는 1993년 발표한 1집 ‘파블로 허니’부터 1997년 낸 4집 ‘오케이 컴퓨터’까지는 대중적인 앨범을 내 음악 팬들의 폭 넓은 사랑을 받았다. 거친 남성미를 내세우는 미국 록밴드와 달리 섬세하고 우울한 감성을 내세우는 영국 록밴드 특유의 정서가 한국 음악 팬까지 사로 잡는 데 주효했다. 할리우드 스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출연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 O.S.T ‘엑시트 뮤직’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2012년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지산밸리록페스티벌에는 라디오헤드의 첫 내한 무대를 보기 위해 무려 3만여명이 몰렸다.

록밴드 라디오헤드 보컬인 톰 요크가 지난 2012년 내한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다. CJ E&M 제공
록밴드 라디오헤드 보컬인 톰 요크가 지난 2012년 내한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다. CJ E&M 제공

신곡 ‘번 더 위치’ 트럼프 저격?

초기 앨범에서 다진 대중성을 바탕으로 라디오헤드는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 음악적 실험을 전개해 나가며 아티스트로의 폭발력을 키웠다. 현실의 모순을 꼬집는 곡도 많이 냈다. 국내에 지난 9일 공개된 라디오헤드의 9집 타이틀곡 ‘번 더 위치’는 마녀사냥을 다룬 노래 제목에서 드러나듯 세계의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광기를 꼬집는다. ‘모든 이유를 무시하고, 눈도 마주치지마’(Abandon all reason. Avoid all eye contact)란 노랫말은 유럽의 이민자 문제를 외면한 정치 세력에 대한 일갈처럼 들린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미국 공화당의 사실상의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는 노래라는 해석도 나온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번 더 위치’의 뮤직비디오 때문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1960년대 말 영국 BBC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 ‘트럼튼’(Trumpton)과 유사한데, ‘트럼튼’을 차용한 게 트럼프를 풍자하기 위해서라고 영국 유명 음악잡지 NME 등은 주장한다. 토착주의를 강조하는 뮤직비디오의 내용이 트럼프의 정치적 성향과도 닮아 나온 해석이다.

라디오헤드는 그간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밴드는 ‘엠네지악’ 수록곡 ‘유 앤 후즈 아미’를 통해 미국 따라 이라크에 영국군을 파병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비아냥 거리 듯 비판한 바 있다. 지난 2008년에는 티베트를 향한 중국의 인권탄압에 항의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밴드는 7집 ‘인 레인보우즈’(2007)에 실린 ‘올 아이 니드’ 뮤직비디오로 아동 노동 착취 문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잘 사는 서양 아이와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동양 아이의 하루를 번갈아 보여주며 아동 착취를 비판한다. 밴드의 보컬인 요크는 2008년 11월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의미로 자신의 솔로 앨범 수록곡인 ‘해로우다운 힐’을 리믹스해 헌정곡으로 무료 공개하기도 했다.

록밴드 라디오헤드.
록밴드 라디오헤드.

‘너한테 달렸어’ 음악 유통 개척자

라디오헤드는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으로 음원을 다운 받는 파격적인 유통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7년 ‘인 레인보우즈’ 앨범 발매 때 한 일이다. 라디오헤드는 1센트로도 다운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밴드가 결제 과정에서 강조한 건 ‘다 너한테 달렸어’(It’s up to you) 란 말이 전부였다. 듣는 너희들이 제대로 창작물에 대해 대우를 해줘야 한다며 소비자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당시 남발하던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라디오헤드는 신곡 유통을 전적으로 음반사에 의지하지 않는다. 라디오헤드는 자신의 앨범을 자사 홈페이지에 제일 먼저 공개한 뒤 음원 유통사에는 뒤늦게 공개한다. 홈페이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스페셜 음반도 따로 판다. 라디오헤드는 음악 유통 방식에서부터 노래까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안팎으로 저항하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왔다. 왜곡된 음원 수익 배분 구조에 시름하는 국내 창작자들과 유통 업체들이 생각해 볼 문제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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