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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관리가 농사의 절반인데, 작업해준 친구 "뭘 얼마여, 자장면 묵었잖어"

입력
2016.05.2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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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서시천변의 꽃양귀비. 벚꽃, 철쭉 다 진 다음에 피는 화려한 색의 꽃이다.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을 유혹하는 곳이다.
마을 앞 서시천변의 꽃양귀비. 벚꽃, 철쭉 다 진 다음에 피는 화려한 색의 꽃이다. 지나가던 행인들의 발을 유혹하는 곳이다.

부쩍 새들이 시끄럽다. 검은등뻐꾸기는 연신 네 박자를 타며 울고 그냥 뻐꾸기도 휴대폰 알람 따라 시간마다 소리를 낸다. 아직도 짝을 못 찾았나 보다. “감나무에 새가 앉아도 안 보이믄……” 하며 대평댁어머니가 잎이 많아지는 요맘때 심으라고 알려주셨던 게 호박인지 토란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긴 뭐든 다 심었어야 하는 때인데 아직 울타리콩은 씨주머니에 남아있다. “조금 늦어도 암씨랑토 안혀” 하시는 간전댁할머니의 멘트는 “늦었더라도 얼른 심으믄 돼야” 하시는 말씀인데 나는 “늦은거 아닝께 걱정말아요. 아직 시간 많어” 이렇게 알아듣는다. 그래서 문제다.

콩주머니 챙겨서 농장으로 들어서는데 희동이가 지 집에서 뛰어 왔다. 철이 없어서 큰 일이다. 이젠 애미된 자로서 품행이 좀더 방정해야 할 때인데, 새끼들 젖 먹이다가도 나만 보면 놀자고 튀어나온다. 키우는 동물들이 주인을 닮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주인 아들을 닮은 경우는 처음이다. 새끼들 세 마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다본다. 사실 나도 얘네들 볼 때마다 황당하다.

새로 태어난 희동이의 새끼들이 어미의 젖을 빨거나 얼굴을 핥고 있다. 애비를 알 수 없어 분양 받으려는 사람이 없다.
새로 태어난 희동이의 새끼들이 어미의 젖을 빨거나 얼굴을 핥고 있다. 애비를 알 수 없어 분양 받으려는 사람이 없다.

며칠 전 장씨아저씨가 “희동이 새끼 밴 거 아녀? 배가 좀 불룩허다” 말씀하신 지 이틀 후 집 안에 쥐 만한 것들이 꼬무락거리는 걸 발견했다. 아내는 나한테 너무 무심한 거 아니냐고 했지만 유심했어도 몰랐을 거다. 양가 상견례도 없었고, 아직도 신랑이 누군지 모른다. 가출이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조신하게 집에만 있던 애가 졸지에 미혼모가 됐다. 애들 아버님이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추측할 단서도 없다. 희동이는 하얀색인데 세 마리 모두 짙은 갈색인 점과 생후 한 달이 안 된 것에 비해 머리가 상당히 크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크고 센 놈이었을 거라는 짐작만 하고 있다. 희동이가 눈이 높았기를 바라지만 알 수가 없다. 미운 마음이 들어 한 대 때려주려다 참았다.

콩을 농막에 두고 감자 밭으로 올라갔다. 제초매트를 덮지 못한 두둑은 점차 초록색이 짙어진다. 비가 한 번 올 때마다 감자 잎도 무성해졌지만 잡초의 성장세도 만만치 않았다. 이틀 만에 해치우겠다던 매트작업이 닷새 만에 절반 조금 넘었다. 답답한 건 내 손의 속도가 아니라 땅속의 모습이다. 감자는 고추나 콩처럼 열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으니 그저 이파리의 상태를 확인하며 예상할 뿐이다. 조금씩 캐 보면서 확인해 보지만, 이 때다 싶어 캐고 나서도 이 때가 아니구나 할 때가 많다. 자식 키우는 기분이다. 시키는 대로 잘 하고 무난히 크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보면 결과가 안 좋을 때도 있고, 저게 저대로 가다가 어떻게 될라나 하는데 제 길 잘 찾아 가는 경우도 많이 봤다.

“조금 있으면 캘 텐데 뭐 할라고 애쓰냐” 동네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뭐하냐고 묻기에 고분고분 답했더니 말로 기운을 뺀다. 나도 그 점을 생각 안 한 바 아니지만 느린 손이 놀림 받는 것 같기도 해서 성을 냈다. “넌 또 드러워질 걸 왜 맨날 씻냐?” 말 같지도 않은 대꾸를 날렸다. 친구는 “논두렁 붙이러 가니까 논으루 와” 하며 말을 잘랐다. 내가 화 낼 처지가 아니란 걸 그 때 알았다. 바로 논으로 달렸다.

매년 이맘때면 논에 물을 받기 전에 논두렁을 손봐야 한다. 겨울 지내고 날이 풀리면서 흙이 무너지기도 하고, 봄철 두더지가 파 놓는 구멍이 열 군데도 넘는다. 삽으로 두둑을 높이고 손으로 흙벽을 발라가며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한다. 못해먹겠다 싶어 올해는 기계의 힘을 빌리기로 했고, 트랙터를 가진 친구가 논두렁 조성기를 빌려 작업한다기에 부탁을 했던 차였다. 비싼 기계를 쓰는 작업이고 한 번에 되는 일도 아닌지라 당연히 작업비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액수를 물었다. 친구는 지 할 말만 했다. “뭘 얼마여. 엊그제 자장면 묵었잖어. 나 바빠.” 그러고는 손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한 농부가 모내기 할 논에 물을 대며 논두렁을 살펴보고 있다. 논두렁 관리가 논 농사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농부가 모내기 할 논에 물을 대며 논두렁을 살펴보고 있다. 논두렁 관리가 논 농사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며칠 후 논두렁을 살펴보니 작업할 때 흙이 마른 편이었던지 여기 저기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라면 다시 수작업을 해야 했다. 친구한테 다시 부탁하기는 미안하고 그전에 옆 동네 동생이 작업을 해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어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한 번 더 작업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제 내린 비에 맞춰 오늘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형님 지금 논으로 출발허요!” 급하게 요기거리랑 음료수를 챙겨 논으로 갔다.

대략 1시간 뒤 작업이 끝났다. 수로에서 걸레를 빨아 흙 범벅인 트랙터 유리창을 닦는 동생에게 커피를 들고 다가갔다. “자네도 고집이 있겠지만 이번엔 내 고집 좀 부려야겠어.” 웬만하면 돈 주고 받는 걸 싫어하는 동생이라 선수를 치고 나갔다. 동생은 작은 눈을 부라렸다. “뭐요. 돈이요? 내가 돈 받을라믄 이 일 안했소. 우리 논 하는 김에 한 거고 앞으로 이럴거믄 말도 꺼내지 말아요. 난중에 국밥이나 한 그릇 사쇼.” 친구랑 똑 같은 뒷모습으로 내뺐다.

훈훈한 마음으로 농장에 돌아와 다시 감자 밭에 앉았다. 헌데 전날까지 작업한 두둑에 시든 이파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직 시들면 안 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비도 적잖이 왔고, 짐승 발자국도 없었다. ‘혹시……’ 의심이 가는 바가 있긴 있었다.

초여름 들판에서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례는 지리산을 뒤로 하고 있어 논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들판이 크지 않은데 그나마도 철쭉 등 묘목을 재배할 목적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사례가 많아 쌀 재배면적은 계속 줄고 있다.
초여름 들판에서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례는 지리산을 뒤로 하고 있어 논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들판이 크지 않은데 그나마도 철쭉 등 묘목을 재배할 목적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사례가 많아 쌀 재배면적은 계속 줄고 있다.

며칠 전 방에 누워있다가 방귀를 뀌었는데 시원하다 싶게 나왔다. 하지만 아내가 이불을 들춰 흔들며 진절머리를 쳤다. “20년 넘게 뀌어 왔구만 뭘 난리야” 했더니 아내는 “나 참. 뭐가 성 낸다구. 방구소리가 아주 드러워!” 소리질렀다. 공감각적 표현이다. “엉덩이가 어떻게 안 썩는지 몰라.” 상상력도 뛰어나다. ‘방귀 뀐다고 엉덩이가 썩으면 자기는 트림 많이 하니까 이 다 썩었겠네’ 속으로 반항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내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작업하다가 내 엉덩이에 닿은 부분이 시들해진 것 같았다. 딱히 분출한 것도 없는데 닿기만 해도 피해를 준다면 그 일대가 썩었거나 그와 비슷한 정도로 오염된 게 분명했다.

고랑에 앉을 때마다 더욱 조심했다. 감자 잎에 닿지 않도록 하려고 새색시 폐백 때 큰 절하듯 가랑이를 쫙 벌리며 엉덩이를 수직으로 떨어뜨렸다. 작업 속도는 더뎠지만 ‘불가촉둔부’에 더 큰 희생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안경에 고인 땀도 닦을 겸 일어서는데 장씨아저씨가 올라오셨다. “허리가 안 좋당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힘들어 그냥 그렇다고 했다. 한 말씀 더 하셨다. “감자 담 달이믄 캘텐데 그냥 놔두지? 허리도 안 좋음시롱.” 아저씨한테는 대들지 못했다. 농막으로 내려갔다.

허리는 아저씨가 안 좋으셨다. 비닐하우스 작업에 조금 무리를 하셨는지 며칠 째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고 하셨다. “호박 시세는 어떤가요. 좀 나아졌대요?” 찬물로 커피를 대신하신 아저씨는 물 맛이 쓴 것 마냥 얼굴을 찡그리셨다. “안 좋아. 매년 그랴. 어린이날 지나믄서 값이 떨어지고 나면 계속 안 좋아.” 그 때 D동생이 농막으로 들어왔다. 지나가다 목 말라서 들어왔단다. “안녕하셨는게라. 미세먼지 땜시 그랑가 요즘은 목이 칼칼해서 물만 땡기네요.” 아저씨가 마셨던 컵에 냉장고 물을 따라줬다. “별 일 없으시지라?” 아저씨는 D동생의 인사에 답 하시듯 말씀을 이었다. “별 일이 있으나 없으나 농사짓기 점점 힘들구마. 김앵란법인가 뭔가도 그렇고” 즉시 의문을 제기했다. “아니 호박이 그렇게 비싼 값에 팔리는 것도 아니고 굴비나 한우처럼 선물세트로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 법이 문제가 되나요?”

꽃송이를 달고 있는 감자 밭.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트와네트가 감자 꽃을 머리와 가슴 장식으로 사용해 감자의 유럽 전파를 촉진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감자 꽃은 감자열매에 도움이 되지 않아 잘라주는 경우가 많은데 어찌해야 할 지 고민 중이다.
꽃송이를 달고 있는 감자 밭.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트와네트가 감자 꽃을 머리와 가슴 장식으로 사용해 감자의 유럽 전파를 촉진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감자 꽃은 감자열매에 도움이 되지 않아 잘라주는 경우가 많은데 어찌해야 할 지 고민 중이다.

아저씨의 의견은 달랐다. 어린이날 이후로 채소 값이 떨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들이를 많이 가고 도시의 식당들이 식자재를 덜 구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정부가 하루 더 쉬라고 없던 휴일까지 만들었고, 호박은 일요일만 빼고 매일 출하하는데 그 출하량이 휴일에는 쌓이기 때문에 평일까지 채소가 남아돌아서 그렇다. 김영란법이 호박 구입하는 걸 막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식당 경기가 안 좋아질 거고, 호박 소비량도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다. 호박 시세에 김영란법이 미치는 영향의 요지다. 약간의 비약이 없지 않아 있지만 딱히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할만한 근거도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아저씨는 공세를 이어갔다. “언제 법이 없어서 문제였나? 안 지켜서 문제지. 효도법도 그렇고 김앵란법도 그렇고, 법으로 사람이 착해지간대? 맨 밑에 있는 우리만 피해보는 거지.” D동생이 거들 듯 말했다. “그라지라. 쳐 묵는 놈들은 어떻게든 쳐 묵드만요. 이렇게 법 만들다가는 반말금지법 뭐 이런 거 나와서 나가 형님헌티 말 놓으면 잡혀가고 그러진 않겄지라?”

두 사람이 돌아가고 다시 감자 밭에 다시 앉았다. 조금 혼란스럽다. 논두렁과 국밥, 김영란법과 호박, 엉덩이와 감자…… 기온은 미친 사람처럼 널을 뛰고 할 일은 지리산인데 정리되는 것은 없고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럽다. 억울하게 죽은 수백 명의 무덤 앞에서 어떻게 노래할지 쌈박질이다. 약한 여성의 희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에게 ‘남자라서’ 죽은 군인들도 있다고 말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게 억울한 놈들까지 있다. 법으로 막아주지 못한다면 내 속에도 혐오가 감자처럼 숨어서 자랄 것 같다.

지리산 부근도 미세먼지를 피해갈 수는 없다. 며칠 째 계속된 미세먼지가 보기에 그럴 듯한 노을을 남기기도 한다.
지리산 부근도 미세먼지를 피해갈 수는 없다. 며칠 째 계속된 미세먼지가 보기에 그럴 듯한 노을을 남기기도 한다.

일하기 싫어서 농막으로 들어왔다. 라디오 어느 광고에서 한 젊은이가 그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술 마시라는 광고였다. 그 말이 확실하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다. 경허선사의 말씀처럼 ‘일 없음이 오히려 나의 할 일(無事猶成事)’이 맞다. 일어나는 아무 일 치고 좋은 게 없다. 이어서 DJ가 알려준다. “이번 토요일이 부부의 날인데요” 별 날이 다 있다. ‘뭐 어쩌라구!’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 날은 뭔가 해야겠다. 미움도 줄이고 아무 일도 없으려면……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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