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차이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립, 반목, 경멸하는 현상을 두고 프로이트는 ‘사소한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다. 남들 보기에 별 것 아닌 차이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생결단식으로 목숨을 거는 심리 밑바탕엔 유아기적 자기애가 있다는 얘기다. 달리 보면 자기애적 정체성을 확인 받기 위해 사소한 차이를 강조하며 갈등을 증폭시킨다고 볼 수 있다.
‘덕후 문화’를 보면 이런 ‘사소한 차이의 나르시시즘’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매니악한 집단일수록 더욱 더 사소한 차이를 갖고 진짜와 가짜, 정통과 이단을 가르고 그 대립의 강도도 심해진다. 오늘날의 ‘히키코모리’(‘틀어박히다’는 뜻의 일본어)격인 중세 수도사들은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 올라 탈 수 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고 하니, 그 사소함에 대한 집착 정도를 알 수 있다. 복상(服喪) 기간을 3년으로 할지, 1년 할지를 두고 벌인 예송 논쟁도 당시 조선이 ‘성리학 덕후’ 사회로 집단적 퇴행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한국 사회에서 연원 깊은 덕후로 첫 손에 꼽히는 부류가 자칭 ‘종북 감별사’들이다. 이들은 구순기 내지 항문기 고착 환자들이 모인 ‘일베’라는 사이트에 터를 잡고 있는데, 요즘 ‘임을 위한 행진곡’ 속에 숨어 있다는 종북 의미 찾기에 분주하다. 대개 덕후들이 사소한 차이 밑에 남들이 모르는 세계의 비밀이 있다고 믿으며 그 의미 해독에서 희열을 찾는데, 세계적으로 보면 이 분야의 원래 갑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이다.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이 그림자 정부를 만들어 세계 지배를 도모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로, 우리나라에서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사탄 숭배 노래라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히트 치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경한 프리메이슨 대신 종북이 한반도 지배를 도모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일 터다.
이들 사이에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김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란 암호 해독이 득세하다가 자기네들이 봐도 이상했는지 요즘은 이 곡이 헌정된, 5ㆍ18 당시 희생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에 시비를 걸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윤상원과 같은 무장 노선을 지지하는 것이라나 뭐라나.
사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그 장중한 선율과 아릿한 가사는, 투쟁을 독려하는 행진곡이라기보다는 스러져간 넋들에 대한 진혼곡에 가깝다. 희생, 애도, 용기, 희망 같은 보편적 정서들이 담겨 있어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렸고 지금도 사랑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 5ㆍ18 때처럼 총칼 들고 정부와 싸우자”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이가 대체 몇이나 있을까, 종북 덕후들의 강박적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해석이다.
대개 훌륭한 문학작품을 비롯해 언어의 의미란 게 누군가의 독점물이 아니듯, ‘임’도 ‘새날’의 의미도 이젠 시대와 함께 변천하는 공유물이 됐다. 무수한 이들이 쌓아 올린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유아들이다. 네 것 내 것 따지며 늘 투정이다.
황당한 것은 이런 일베적 덕후 마인드가 지금 정부 인사들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18일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소식을 보고 혹시나 싶어 일베를 봤더니, 역시나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합창과 제창의 차이를 두고 갈등을 증폭시킨 이답다.
프로이트는 ‘사소한 차이의 나르시시즘’을 자아 분석을 넘어 정치사회적 공동체간 갈등의 분석 도구로도 확장시켰는데, 자기 공동체의 손 쉬운 단결을 위해 타 공동체와의 사소한 차이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기반을 둔 ‘덕후 정치’는 늘 위험하다. 강렬한 자기도취적 에너지를 동원해 지지층의 결집을 시도하기 때문에 타협과 조화의 협치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사소한 차이를 두고 끊임없이 편을 가르며 갈등과 반목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5ㆍ18 기념식장에서 쫓겨나면서 웃고 있는 박 처장의 표정에서 그런 일베적 기질이 읽혔다. 한국 정치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사소한 차이를 갖고 논쟁하면서 퇴행하게 될지 모르겠다.
송용창 정치부 차장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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