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모든 희생자 기리는 것”
방문 여부 구체적 답변 안 해
한일간 신경전으로 확산 우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일본 히로시마 방문을 앞두고 백악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지점(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구체적 동선(動線)을 놓고 동아시아의 두 동맹인 한국과 일본의 기대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공원 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까지 찾아주길 희망하지만, 은연중 피해국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일본은 부정적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의 곤혹스러운 입장은 18일 기자회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목적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비롯한 모든 무고한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평화공원 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방문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태 담당 선임보좌관은 이날 워싱턴 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기간, 그리고 미군의 원폭 투하로 희생된 모든 무고한 사람을 기리고자 히로시마를 방문한다”고 말했다. 또 “역사적 기록을 보면 원폭 투하로 수많은 일본인에 더해 많은 한국인도 희생됐다. 중국과 남아시아 등 다른 아시아인들, 그리고 미국인 전쟁포로 등 몇몇 서구인들도 희생됐다”며 “우리가 ‘오바마 대통령이 모든 희생자를 기리고자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자회견에 함께 참석한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크리튼브링크 보좌관은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둘러볼 ‘원자폭탄 전몰자 위령비’에서 불과 200m 떨어진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방문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다른 입장 사이에서 미국 정부가 최종 결정을 미룬 채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외교부 주변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신경전으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관계자는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일정에 제3국인 한국이 관여하는 건 외교적 결례”라면서도 “자칫 미국에 대한 한국 여론이 나빠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우리 정부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방문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를 미국 측에 수차례 전달했지만, 뚜렷한 답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우리 정부가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 것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한국인 위령비’ 방문이 끝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일본 외교의 승리, 한국 외교의 실패’로 비쳐지고 비난의 화살이 외교 당국으로 쏟아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6일부터 이틀간 일본 미에현 이세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를 찾을 예정인데, 일본 내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국내 피해자 및 관련 단체들은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참배를 촉구하고 있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ㆍ김광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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