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과 영상으로 무수히 봐 왔던 풍경이다. 그 익숙함 때문에 감흥은 그리 크지 않을 줄 알았다. 막상 닥쳐보니 그게 아니다. 코발트빛 아드리아해로 돌출된 오렌지빛 지붕의 고도(古都) 두브로브니크(Dubrovnik)의 감동은 상상 이상이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마치 고혹적인 고성이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론리플래닛은 ‘두브로브니크는 황홀한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말을 잃게 만드는 독특한 곳이다’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웅장한 성벽에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타임캡슐 같은 곳. 멋드러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로 빼곡하다. 성벽 안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찬란히 빛을 뿜는다.
아드리아해의 햇살은 부드러웠다. 빈손 가득 햇살을 움켜쥐어 본다. 보석 같은 도시를 스친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숭늉빛이었다. 바다 빛, 지붕 색이 제대로 살아날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스르지(Srd)산 전망대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니 조금씩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케이블카를 타는 잠깐의 시간, 요정의 도시가 마술을 부린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파래졌고 바다와 도시는 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회색 성곽으로 둘러싸여 오렌지빛 지붕을 이고 있는 올드시티. 케이블카 안에선 탄성이 튀어나왔다.
전망대에 올라 두브로브니크를 한눈에 조망한다. 마냥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지만 도시가 들어앉은 자리가 녹록지 않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직접 부딪치는 곳이고 베네치아와 발칸, 오스만 세력 간의 피 튀기는 전쟁이 반복되던 곳이다. 지정학적으로 싸움이 끊일 수 없는 그 갈등의 한 복판에서 꿋꿋이 버티며 꽃을 피워온 도시가 두브로브니크다. 열강의 다툼 속 중립을 지키며 스스로를 보전해 온 영리한 도시다.
천혜의 항구에 터를 잡은 두브로브니크는 비잔틴제국의 도움을 받아 지중해와 발칸을 잇는 연안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높다란 산맥도 두브로브니크 인근에서 낮아져 내륙으로의 이동로를 열었다. 해상과 육로의 교차점에서 두브로브니크는 몸집을 키웠다. 바닷길로 터키와 지중해의 산물이 오갔고 발칸의 내륙으로 대상무역이 이뤄졌다.
소금 독점 등의 황금기를 거쳐 신대륙 발견의 대항해 시대에도 분투하던 도시는 뜻하지 않은 대재앙에 무너졌다. 1667년의 대지진이다. 5,000명이 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고 도시 내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됐다. 하지만 자부심 강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재건 사업에 나섰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있던 자리는 당시로선 첨단인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로 대체됐다.



두브로브니크 올드시티의 성벽 위를 걷는다. 바다와 내륙에서 쳐들어오는 적으로부터 도시를 수호하던 성벽은 이제 푸른 바다와 수려한 산세까지 끌어 안는 두브로브니크 풍경의 중심이 된다.
성벽에서 성 내부의 아름다운 지붕선을 내려다 본다. 물결치는 오렌지빛의 지붕들. 그 사이를 비집고 교회의 종탑 등이 치솟았다. 오렌지빛 바다 위를 거니는 듯한 즐거움이다.
성벽 너머 아드리아해의 수평선이 날카롭다. 그만큼 공기가 맑다는 이야기. 저 지붕의 붉음은 매일 저녁 번진 아드리아해의 노을이 차곡차곡 쌓여 빚은 색이 아닌가 싶다. 자세히 보니 지붕의 색이 조금 차이가 난다. 빛이 바랜 지붕과 새것 같은 진한 오렌지빛 지붕들. 오래된 건 포탄을 피해 남아있는 것들이고. 새것은 포탄에 무너져 새로 올린 지붕들이란다.
1991년 유고내전 당시 두브로브니크는 3개월간 무차별 포격으로 황폐화됐다. 서구의 지식인들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하지 말라며 인간사슬을 자청하고 나섰지만 도시는 야만적인 침략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성벽 내 824개 건물 중 68%가 포탄을 맞았고 테라코타 타일 지붕 3개중 2개 꼴로 구멍이 뚫렸다. 성벽 안의 건물 등엔 314번의 폭격이 이뤄졌고, 두꺼운 성벽에도 111번의 포탄이 떨어졌다. 궁전 9개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됐고, 성당 등 주요 건물들이 심각하게 손상됐다. 비용은 엄청났지만 모두들 재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도시는 다시 과거의 위엄을 되찾았고 방문객들은 다시 만난 두브로브니크에 눈물을 쏟아냈다. 거듭된 핏빛 아픔이 배었기에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움은 깊이를 더한다.


밤이 깊어 어둠이 내리면 성의 윤곽이 도드라진다. 건물과 성벽의 굴곡도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도시가 겪었던 고난의 주름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하지만 밤의 골목을 즐기는 이들은 마냥 즐겁다. 노천카페에서 와인과 차를 기울이며 두브로브니크의 낭만을 향유한다. 언제 그러한 고통의 역사가 있었느냐는 듯.
가로등의 은은한 불빛이 도시를 감싼다. 누르스름한 불빛은 로맨틱하고 성벽에 기댄 연인들의 몸짓은 에로틱하다.
두브로브니크(크로아티아)=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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