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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매일 매일 죽음과 함께 삶을 살아 가다

입력
2016.05.1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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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늙음을 자각하자 동시에 연이어 올 나의 죽음이 떠올랐다. 누군들 안 그랬을까만, 그래도 나는 나의 유난한 철없었음에 수많은 시행착오에 치를 떨고 있던 터였다. 늙음 뒤에 따라 오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걸, 마치 지동설이라도 발견한 듯이 여겼다. 죽음이 나의 남은 생에서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줄 거로 생각하고, 혼자 좋아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죽음 공부, 죽음회 독서, 죽음 관련 포럼이니 그런 데를 쫓아다니다 보니, 늘그막에“바쁘다, 바빠” 소리를 입에 달고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20여 년간 지속하는 ‘메멘토 모리 독서회’는 나를 제법 유식한 사람 비슷하게 변화시켜 줬다. 매달 한 권씩 책 한 권을 정독하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 좋아서 공부하고 천착하는 그 일에 외부압력이라면 거창하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깨나 들어 넘겨야 하는 고충 아닌 고충이 있었다. 사람들이 ‘죽음’을 거의 금기시하고 금기어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아침부터 ‘죽음’얘기를 꺼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염려를 조금하고 있다. 내 입에서 ‘죽음회’니 ‘죽음 독서회’니 하는 단어가 자연스레 나오다가, 주위의 진지한 충고에 따라 지금은 ‘메멘토 모리 독서회’라고 부른다. 동창회 같은 모임에서도 내 입은 자동으로 죽음을 화제로 올려놓는다.

죽음에 천착한지 어느덧 30여 년이 지났다. 지금 세상은 100세 시대를 향하고 있어 그런지, 혹은 우리 죽음회 활동 덕인지 몰라도 이제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고 싫어하지는 않는다. 가끔 노인들 대상으로 얘기할 때에도 죽음 내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라는 얘기를 하면, 열심히 경청해 준다. 누구나 코앞에 닥친 너와 나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나 보다.

죽음과 관련해서 나는 레이몬드 무디 목사나 최준식 교수 같은 ‘사후 생’에는 별 관심이 없다. 더구나 스베덴 보리 박사의 천국체험 얘기 같은 거는 질색이다.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이 임박할 때를 대비해서 펄펄 살아 있는 지금 죽음 준비를 해 두고, 정작 죽음이 임박한 임종기에 어떻게 잘 살까 하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하여 마지막 그때가 닥쳤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결단하게 할 소위 ‘사전의료 지향서’ 작성에 관한 계몽에 주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이 이 사전의료 지향서 작성에 흔쾌히 동참하는 사실에 만족한다. 엊그제 국회에서 ‘웰 다잉’ 법이 통과되어 보다 더 떳떳이 이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대 놓고 비난은 안 하지만 의향서 작성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지는 친구도 더러 있다. 생의 스타일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죽음과 관련된 스타일은 2가지로 갈린다. 종교 유무를 떠나서 흔쾌히 의향서 작성에 동의하거나 아니거나.

나는 인생에서 뒤늦게 내 주도하에서 두 사람의 죽음과 맞닥뜨렸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 할 어머니와 남편의 죽음이었다. 단단히 각오한 죽음 앞에서 나는 의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슬픔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제 막 일 년이 지난 남편의 죽음은 그야말로 사전의료지향서의 효력을 톡톡히 본 사례였다. 마지막 즈음에 의사는 당연한 일인 양 기도 삽입관을 비롯한 대여섯 개의 관을 남편의 몸에 꽂겠다고 통고해 왔다. 그 때 나는 지갑 속 주민등록증 옆에 끼인 사전의료지향서를 내밀었다. 지향서를 보자, 의사는 “아~ 저희도 이런 죽음을 원합니다”라고 했다. 딱 일주일간, 남편은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고 즐거이 담소하다 갔다. 물론 의사는 그 과정에서 고통 등의 증상을 하나하나 줄여 주었다. 혈압이 오르면 내려주고 아프면 진통제를 주는 식이었다.

어쩌면 내가 죽음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내 남편은 오늘까지도 말도 못하고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목숨 줄을 이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 없는 경건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고 많은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조엘 드 로스네 MIT교수, 파스퇴르 연구소 디렉터)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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