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5월 16일
1920년대 미국 경제는 유럽의 전쟁과 전후 재건 특수 덕에 유래 없는 호황을 누렸다. 산업 생산은 10년 새 두 배가 늘었고, 주식시장도 풍선처럼 부풀었다. 노동운동은 활성화하기 전이었고, 부의 분배는 부의 신장세에 턱없이 못 미쳤다. 오히려 새로운 기계의 도입 등에 따른 기술적 실업이 만만찮았다. 실업보험 등 연방 복지정책은 전무했다. 가전제품들이 보급되면서 자본주의적 소비사회가 틀을 잡긴 했지만, 서민ㆍ중산층에겐 그 물량을 충분히 소비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재고가 쌓이면서 해고는 더 늘어났고, 대규모 가뭄으로 농촌 경제가 먼저 붕괴했다. 여러 요인들이 겹쳐 1929년 대공황이 그러다 시작됐다.
미국 영화 예술ㆍ과학 아카데미(AMPASㆍAcademy of Motion Pictures Arts and Sciences)가 설립된 게 경제호황의 절정이자 대공황 직전인 1927년 5월이었다. 시동을 건 MGM사의 오너 루이스 메이어의 원래 구상은 노조 없이 영화업계의 이런저런 분쟁을 조정해낼 조직을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아카데미 회원 자격은 배우, 감독, 시나리오 작가, 촬영 등 기술자와 제작자로 제한했다. 첫 공식 미팅이 27년 5월 11일 이뤄졌고, 230명의 창립회원들은 더글러스 페이뱅크스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어쩌다 보니 처음엔 관심사도 아니어서 언급조차 안 되던 아카데미 상 얘기가 이듬해 제기됐고, 이사회가 회원 투표를 통해 12개 부문 상을 제정한 건 28년 7월이었다. 그리고, 1929년 5월 16일 할리우드 루스벨트호텔에서 첫 시상식이 열렸다. 15분만에 끝이 난 다과회를 겸한 회원 친목모임이었고, 270여 명의 참석자들은 인근 메이페어 호텔에서 주 이벤트인 별도의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넉 달 뒤인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폭락하며 대공황이 시작됐다. 노동자 실업과 살인적 디플레이션뿐 아니라 기업들마저 연쇄 도산을 하는 판이었으니, 아카데미가 대비하던 노동문제가 불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카데미가 본연(?)의 임무보다 아카데미 상에 치중하게 된 데는 저런 사정도 있었다. 미국의 노동운동이 본격화한 건 뉴딜정책으로 미국 경제ㆍ사회가 안정을 찾기 시작하던 30년대 중ㆍ후반부터였다. 35년 12%였던 미국 노동자들의 조직율은 45년 35%로 급신장했지만, 그 무렵엔 노동문제에 관한 한 아카데미보다 유능한 FBI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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