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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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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입력
2016.05.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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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유롭게 불려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유롭게 불려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따, 참 답답하군요. 뭐가 국론분열이랍니까?”

지난 13일 오후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엔 허탈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여야 원내대표와 청와대 회동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5ㆍ18민주화운동 기념곡 지정 요구와 관련해 “국론분열이 생기지 않는 좋은 방안을 찾아보라고 국가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근본적으로 (박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5ㆍ18기념곡으로 지정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죠. 해도 너무하네요.” 말끝을 흐리던 그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58)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얘기다. 전날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이 정권 아래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려지기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면서도 내심 박 대통령의 화답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매년 5월만 되면 ‘반짝 스타’가 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5월1~17일까지만 유명인사”다. 2009년부터 해마다 5월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및 5ㆍ18기념곡 지정을 두고 보수진영의 폄훼ㆍ왜곡 시도 등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작곡가인 그에게 언론 등의 관심이 쏟아진 탓이었다. 지난 10일엔 사단법인 오월어머니집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주는 오월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모를까요? 다들 알고 있다고 봅니다. 보수단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불순한 선동가가 아니에요. 이 노래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까지 무릅쓴 광주시민에 대한 사랑의 노래입니다.”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 1982년 4월 스프링노트에 오선을 그어 4시간 만에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세월의 무게를 반영하듯 누렇게 색이 바랬다.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 1982년 4월 스프링노트에 오선을 그어 4시간 만에 작곡한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세월의 무게를 반영하듯 누렇게 색이 바랬다.

김 사무처장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건 전남대 경영학과 3년이던 1982년 4월쯤이었다. 그는 80년 5월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79년 노동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치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문화운동을 하던 10여명과 함께 결혼식 선물로 노래극 테이프를 만들기로 했다. 음반 제작은 당시 광주에서 문화운동을 하던 소설가 황석영씨 자택서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군용담요로 창문 등을 둘러막은 뒤 소형 카세트를 놓고 1박 2일 동안 이뤄졌다. 가수가 꿈이었던 그는 평소 틈틈이 써놓았던 6곡을 조금 바꾸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4시간 만에 작곡한 뒤 30분짜리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 음반에 마지막 합창곡으로 삽입했다. 가사는 백기완 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80년 12월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씨가 붙였다.

그가 당시 노래극 제작에 참여한 것은 ‘살아 남은 자의 부채 의식’ 때문이었다. “5ㆍ18 당시 공수부대가 무서워 도망만 다녔죠. 그 땐 살아 남았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나마 노래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 먼저 가신 ‘임’들에 대한 부채감을 덜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죄인 아닌 죄인처럼 34년간 품고 있던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을 얼마 전 5ㆍ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기증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그의 삶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는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두고 내가 노래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80년 5월 그날의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것이다. 제3회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탈 정도로 열정적인 음악인이었지만 결국 그는 군 제대 후 가수의 꿈을 접고 평범한 직장인의 생활을 택했다. 그는 “비록 노래는 포기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로서 부끄러운 삶, 엉터리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했다”며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가치와 정신은 내 삶 곳곳에 강하게 박혀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그가 음악을 완전히 끊은 건 아니었다. 그는 첫 직장이던 광고회사를 그만 두고 14년 동안 음반사를 운영하는 등 음악 관련 경영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음악인의 길을 다시 걷게 된 그는 7년 전부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주제로 뮤지컬을 만들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무대에 당당히 올리는 것이다. 이미 시나리오와 컨셉 앨범도 제작해 놓은 상태다. 그는 “5ㆍ18이 교과서 속의 박제된 역사만으로는 그 의미와 정신을 알리는데 한계가 있다”며 “프랑스대혁명이 음악과 영화 등을 통해 전 세계가 그 가치를 접할 수 있는 것처럼 5ㆍ18도 문화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예술로 승화시켜 영원히 5월 정신이 이어지게 하는 게 나와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이 뮤지컬 제작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제작비(30억원 추정)를 투자할 기업 등 후원자들이 선뜻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래도 기업 입장에서 보면 논란이 제기된 노래를 주제로 한 뮤지컬에 투자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며 “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이 5ㆍ18기념곡으로 지정되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 사무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갖고 있다. 이 노래를 5ㆍ18 뮤지컬로 만들어 광주를 대표하는 문화ㆍ관광산업 핵심 콘텐츠로 활용한다면 지역경제가 활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뮤지컬을 기반으로 해 매년 5월 한 달 동안 금남로와 아시아문화전당 일대에서 광주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는 ‘메이 페스티벌(May Festival)’을 여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 세계인들이 광주를 찾아와 5월 정신을 느끼고 관광도 하고 밤엔 상설극장에서 5ㆍ18뮤지컬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경제 구조가 취약한 광주가 자신감을 갖지 않을까요? 그래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5ㆍ18기념곡 지정이 중요한 겁니다.”

광주=글ㆍ사진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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