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노동당 제7차 대회가 지난 5월 9일 나흘간의 일정을 끝냈다. 이 대회는 36년 만에 열렸다는 사실과 김정은의 통치전략이 제시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7차 당대회는 김일성-김정일주의에 기반을 둔 ‘노동당위원장’ 김정은의 유일지도체제를 대내외에 공식화한 것에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그리고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과 남북 군사회담, 북미 평화협정 제안과 같은 정책도 제시됐다. 철저한 언론통제 속에서 진행된 당대회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북한이 김정은의 확고한 지도력 하에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 현실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당 총비서나 국방위원장 직을 승계하지 않고 신설 노동당위원장 감투를 썼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정치적으로 호명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군사강국 건설이 평화를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은 북한 앞에 놓인 안보 불안과 그에 따른 군사주의 노선이 지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런 한계 속에서 경제발전 전략과 대화 제의는 남한과 미국 등 상대방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선전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중국마저 최소한도의 의례적인 축전을 보낸 것이 전부다. 이런 녹록지 않은 안팎의 상황에서 ‘김정은호(號)’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가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개혁개방노선을 전면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 이전에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였고, 개혁개방노선의 공식화 이후에는 역내 안정을 일관되게 추구하였다. 그로부터 정책 결정집단의 중심이 이념에서 실리로 변화했다. 중국의 사례를 북한에 적용해볼 경우, 남북한 체제경쟁과 미국과의 적대관계에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북한은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단행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된 이후 구소련이 급진적인 개혁개방을 펼치다 몰락한 사례를 북한은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다. 북한은 소련 붕괴의 원인을 공산당이 사회주의 이념과 대중 지도노선을 포기한 것에서 찾는다. 이번 당대회에서 박봉주 등 경제 관료가 최고 정책 결정집단에 들어가고 일부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분석이 있다. 그렇지만 중국과 소련의 경험과 그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평가를 고려할 때 김정은호가 빠르고 폭넓게 개혁개방을 추진할 여건과 의지는 높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여전히 많은 주민이 국제기구가 권장하는 영양 섭취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대외적으로도 정상적 외교관계와 교역을 하지 못하고 파상적인 제재에 노출되어 있다. 부족과 위협이 일상화된 가운데 수십년 만에 열린 당 대회가 구체적인 성과는커녕 실현 가능한 비전을 제시하기에도 벅차 보였다. 노동당 7차 대회는 김정은을 새 유일지도 체제의 ‘최고수위’로 선보인 대내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로서는 남북한 관계와 통일 전망과 관련지어 김정은호의 향방을 내다보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군사 대화 제의가 진정성이 없다고 일축하고 제재를 일관되게 전개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외부의 제재를 비난하는 김정은의 발언을 제재 효과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일방적인 평가마저 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미 정부는 소련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하며 핵군축을 끌어냈다. 조지 W. 부시 정부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면서도 6자회담 안팎에서 대화하며 비핵화를 견인했고, 한국전쟁 종식을 겨냥하며 김정일과 춤출 의향도 보였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열세와 고립에 빠진 김정은 정권의 미래는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의 대북정책에도 달린 것이다. 관건은 북한을 붕괴의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보느냐다.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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