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의 초성만을 딴 말인데, 유년 및 청소년 세대가 즐겨 쓰고 있다. 화자가 어떤 주장을 담은 말끝에 덧붙여서 호응과 찬성을 유도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또한 청자가 그 주장에 대한 반응에서 찬반의 입장을 간결하게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ㅇㅈ’은 인터넷 채팅방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 없다(No 인정)’는 ‘ㄴㅇㅈ’으로 줄여 표기된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A: “탕수육은 부먹(부어 먹는 것)인 거 ㅇㅈ?” B:“ㄴㅇㅈ 탕수육은 찍먹(찍어 먹는 것)도 맛있어.”
‘ㅇㅈ’에 대한 갈망을 사이버 공간에서의 무차별적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만 간주해버리고 마는 것은 잘못이다. 젊거나 어린 세대가 ‘ㅇㅈ’을 자주 쓰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회 전체로 보아서, 부모들이나 세상의 ‘꼰대’들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을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격체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ㅇㅈ’받지 못한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절망적으로 ‘ㅇㅈ’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성숙한 사회라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도 정치적이고 윤리적이고 문화적으로 그들의 삶 전체와 삶의 갖가지 중대한 행위들을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며 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존재라는 것을 ‘ㅇㅈ’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전체로 보아서 그것을 인정하는 성숙한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누군가를 ‘ㅇㅈ’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사회적 현존 및 그 사람 고유의 문화적, 윤리적 가치를 제대로 혹은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승인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절망적으로 사회적 ‘ㅇㅈ’을 요구하는 다른 세대로는 노년 세대가 있다. 노년 세대 중에서 특히 재산이나 권력 등이 거의 없는 분들은 하루 종일 종편 방송을 즐겨보고, 선거에서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과는 전혀 반대로 줄곧 보수 정당에 높은 투표율로 지지를 보내며, 공짜 지하철의 노인석에서 큰소리로 서로의 나이를 밝히고 따져나가면서 사회적 인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정 요구는 왜곡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충분히 납득될 만하다. 이분들은 가진 게 나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농촌에서 태어나서 1970년대 압축 성장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 분들로서는 소위 ‘박정희 노스탤지어’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감을 스스로 ‘ㅇㅈ’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한국의 다른 ‘ㅇㅈ’ 투쟁 방식으로 고공 농성이 있다. 이것은 주로 노동자들, 특히 노동할 권리가 부인된 해고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삶의 벼랑 끝에서 채택하는 것이다. 또, 갖가지 집회나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존권이나 기본 인권이 무시당하고 짓밟힌 사람들,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으로 정당한 애도의 권리 및 조의의 기회를 박탈당한 유가족 및 남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ㅇㅈ’ 요구 내지는 ‘ㅇㅈ’ 투쟁의 형식이다. 물론, 국가 권력은 주로 사람 정면을 향해서 물대포를 쏘아댐으로써 이것을 ‘개’무시하고 있다.
그 밖에도 한국 사회에서 ‘ㅇㅈ’받고 있지 못한 사례를 나열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 조기에 정년퇴직 당하거나 정리해고 당하는 노동자들, 침묵을 강요당하는 동성애자들, 표현 및 발표의 권리를 박탈당한 예술가들, 집 없는 사람들, 또 집 있는 ‘하우스푸어’들….
‘ㅇㅈ’은 사회적인 한에서 상호 인정이며, 또 제도에 의해 실질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 모두에게 상호 인정에 필요한 최소한의 관심, 존중, 소통, 우애, 연대 등의 태도를 서로 요구하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윤리적,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삶과 살림을 그에 상응하는 경제 및 사회 제도로써 뒷받침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후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를 일상의 뿌리에서부터 실현해내고 또 그것을 실체적으로 구현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호 ‘ㅇㅈ’ 과정의 밑바탕이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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