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로 물건값을 치를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가맹점 계산대 위에 놓인 사인패드(Sign Pad)나 종이로 된 전표에 본인 서명을 하는 일입니다. 어떤 방식이 됐든 서명에 공을 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손으로 일(ㅡ)자를 그어 서명하거나 바쁠 땐 가게 주인에게 서명을 아예 맡기는 경우도 허다하죠. 애초 카드의 실제 소유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로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금융위원회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 지난해 하반기 ‘5만원 이하 무서명 카드거래 활성화 방안’을 내놨습니다. 결제 때마다 일일이 서명해야 하는 고객의 번거로움은 줄이면서 동시에 카드 수수료 인하로 수익이 줄게 된 카드사의 비용 부담은 덜어주겠다는 취지였죠. 카드 수수료 인하 여파로 울상을 짓던 카드사들도 두 팔 벌려 환영했습니다. 어차피 본인 확인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서명 1건당 밴(결제대행업체) 대리점에 줘야 하는 수수료라도 아끼자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제도 도입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표수거를 대가로 받는 수수료 수익으로 생계를 꾸리는 밴 대리점들이 들고 일어선 겁니다. 카드사는 밴사에 100~110원의 밴수수료를 지급하고 이중 35원이 밴 대리점의 몫입니다. 소비자가 카드 결제 후 전표나 사인패드에 본인 서명을 하면 밴 대리점은 전표와 이미지를 일일이 모아 밴사에 보내는데 이에 대한 대가인 셈입니다. 이런 수수료 체계를 고려할 때 무서명 거래가 활성화되면 전표수거 일이 사라진 밴 대리점으로선 수익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카드사, 밴사, 밴 대리점이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지만 뚜렷한 해법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카드사와 밴사는 밴 대리점이 하지 않는 일에 수수료를 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밴 대리점은 어차피 5만원 이상 전표는 이전처럼 수거하러 가게에 들러야 하는 만큼 5만원 이하 전표를 걷지 않는다고 해서 수수료를 모두 깎아선 안 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지난해 기준 전체 카드거래 중 5만원 이하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84%입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100장의 전표를 수거해야 했는데 앞으로는 16장만 걷으면 임무가 끝나는 셈이죠. 그러나 밴 대리점 쪽에서 보면 100장이든 16장이든 수거해야 할 전표만 줄었을 뿐이지 교통비를 내고 가맹점을 찾아 전표를 수거하는 일은 이전 그대로 거든요. 또 전표수거 일 외에도 가맹점 단말기 관리와 같은 일도 하는데 이런 서비스 비용이 36원안에 모두 포함돼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전표수거 안 한다고 36원 다 깎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3자간 접점이 찾아지지 않자 결국 정부가 나섰습니다. 정부로서도 좋은 취지를 갖고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만큼 잡음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정부는 4차례의 중재 끝에 밴 대리점 손을 들어줬습니다. 밴 대리점이 주장한 대로 전표수거 수수료엔 전표 수거 외에도 단말기 관리와 같은 모든 서비스 비용이 포함된 만큼 수수료 36원을 다 깎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부는 밴 대리점의 챙기는 수수료를 6원 깎아 24~30원으로 조정하되 카드사와 밴사가 6대 4 비율로 이를 밴 대리점에 보전해주도록 했습니다. 카드사가 대략 15~18원, 밴사는 10~12원씩 부담하도록 한 겁니다.
이번 정부 중재안을 두고 카드사와 밴사 사이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이 지나치다는 겁니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을 두고 정부가 나서서 괜히 밴 대리점에 주지 않아도 될 수수료를 주게 생겼다는 불만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선 정부 개입으로 상대적으로 약자인 밴 대리점들의 목소리가 밴 수수료에 반영돼 긍정적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만 이번엔 정부의 개입으로 3자간 갈등이 빨리 봉합되긴 했지만 앞으로 이런 비슷한 갈등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결제 환경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전표를 수거하는 밴 대리점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런 갈등이 생길 때마다 정부가 나서서 매번 중재자 역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후반 신용카드가 국내에 도입된 후 밴사도 크게 성장했지만, 시장 자체가 몇몇 밴사에 의해 굴러가는 독과점 형태라 밴 수수료는 그 동안 왜곡돼 있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카드 수수료가 내려갔는데도 밴 수수료는 요지부동인 것도 카드사로선 불만이었고요. 정부가 아예 시장에 개입할 거였다면,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까지 건드리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그런 문제까지 조정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일단 당장 드러난 문제만 중재했다고 하는데요. 사실상 임시방편이라는 얘기인데, 골치 아픈 일은 일단 뒤로 미루는 정부의 습성이 반영된 건 아닌지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 결과를 두고 자평하는 정부가 마땅찮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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