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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5월의 달력

입력
2016.05.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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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 출입문에는 꽃을 선물하는 날이 잔뜩 적혀 있었다. 로즈데이, 부부의 날 등 처음 보는 기념일이 많았다. 하긴 조금 억지스러우면 어떠랴. 꽃을 주고받는 것은 언제든 즐겁고 기쁜 일이다. 진은영 시인이 쓴 기념일에 관한 시가 생각난다. “진희영 생일 3월 15일/윤정숙 결혼기념일 3월 15일/진은영 생일 3월 17일/그러니까 동생이 출생하고 나서/엄마가 결혼하고/나 태어나게 되었지”(‘푸른색 Reminiscence’ 1연) 그러니까 기념일은 시간의 좌표에서 지긋지긋한 하나의 축을 슬그머니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갑자기 공평해지면서 뒤죽박죽 새로운 시간의 질서가 생겨난다. 시인은 이어서 쓴다. “다트 화살을 힘껏 던지면/시간의 오색판이 빙그르르 돌아간다”고.

시인의 상상력에 기대어 어린이와 어버이와 석가와 스승을 같은 달의 친구처럼 생각하며 5월의 달력을 읽을 수도 있겠다. 나이 듦이 성숙이나 지혜와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여투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물론 역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단절과 부정을 포함하며 진행되는 성숙과 전승(傳承)의 자리는 분명 존재할 것이고 존경할 만한 ‘어른들’도 적지 않을 테다. 그러나 어린이(청소년)/어른의 위계나 ‘나이 듦’의 권위를 둘러싼 서사가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방증은 많다. 가령 조금은 극단적인 이야기일망정 ‘어버이연합’이라는 이름의 집단이 그간 보여온 행태는 ‘어버이’라는 말의 가장 무참한 용례로 기록되어 마땅하다. 청와대의 기획과 개입을 말해주는 최근의 폭로는, 그 위계나 권위의 서사가 반동적이고 퇴행적인 이데올로기의 잔재와 언제든 연루될 수 있다는 유력한 증거일 테다. 어린이가 마냥 순수할 리도 없지만, 어른 역시 특별히 지혜롭고 성숙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인간 진실에도 맞고 민주주의의 성숙에도 도움이 되는 일 일지 모른다. 한국 소설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성장서사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윤성희의 소설에서 나이에 따른 위계의 목소리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인물들의 말과 목소리는 아이, 어른, 노인의 규범화된 자리를 비켜 종종 자유롭게 발화된다. 윤성희 소설의 유난한 생기를 이 지점에 국한에서만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자유가 윤성희 소설이 놓지 않고 있는 인간 진실의 특별한 이해 방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양말 회사 임원으로 있는 한 사내가 몸살로 이틀을 결근한다. 아내와는 사별했고, 딸은 아버지를 떠났다. 그의 생활은 코드를 빼버린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 옆에 들여놓은 소형 냉장고가 말해준다. ‘이틀’이라는 소설 이야기다(소설집 ‘베개를 베다’, 문학동네). 혼자 약국에서 돌아오다 작은 공원에 들른 그는 양말을 벗고 발지압용 자갈길을 걸어본다. 몇 걸음 걷자 너무 아프다. 앞으로 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엄살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 아프다고, 하고 혼잣말을 했다.” 아프다고 하는 말을 근사하게 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엄살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이틀째 그는 우연히 트럭 아래 누워 있던 할머니를 만나는데, 정말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 “그럼 내가 저녁이라도 사줄까?” 할머니 밭일을 도와주고 얻어먹는 짜장면과 소주 한잔. “내일은 출근해. 땡땡이는 딱 하루면 좋아.” 그는 사실 이틀째라고 고백하고 내일도 또 땡땡이를 치고 싶을까 봐 무섭다고 말한다. “양말 만드는 게 뭐 무서워. 가서 만들면 되지.” 그렇지만 그는 지금 내일이 무서운 것이다. 소설은 다시 한 번 자갈길을 걷는 사내의 모습으로 끝난다. 누군가 자갈 위에 벚꽃을 뿌려놓았다. “자꾸 걸으니 어제보다는 덜 아픈 것 같았다. 그래도 아파, 아프다고, 하고 엄살을 부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엄살을 부린다고 야단맞은 기억밖에 없다. 근엄한 가면들이 안쓰럽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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