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한국에서도 이렇게 먹어?”
극단 사계(四季)에 입단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극단의 선배 몇 명을 자취방으로 초대해 김치찌개와 떡볶이를 대접했다. 내가 차린 음식을 보고 선배가 저렇게 물었다. 너무 매운 음식을 먹는다는 뜻인가? 질문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제일 좋아한 음식들이에요.”
선배들의 눈빛이 빠르게 교차했다. 뭔가, 이 분위기는……. 조금 전 질문을 던진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우린 다 알고 있어…….”
“뭘요?”
흠, 하고 제일 나이가 많은 선배가 헛기침을 했다.
“너 한국에서 공주라면서? 우린 네가 왕족이란 거 다 알아.”
헛기침을 했던 선배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비밀 지켜줄게.(솔직히 말해줘.)”
“아니에요, 전혀.”
황당했다. 내가 몇 번이나 아니라고 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지 않았다.
“다 알고 있어. 우리끼리 비밀로 할게!”
선배들이 돌아간 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들이 왜 나를 공주라고 생각했을까. 일본엔 왕족이 있으니까 한국에도 공주가 있을 거라고 착각할 수는 있지. 그렇지만 어쩌다 내가 한국 공주로 알려진 거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선배들이 소곤소곤 주고받던 말을 우연히 들었다.
“본영이 엄마가 아사리 회장님보다 더 무서운 분이래.”
내가 사계에 처음 왔을 때 이야기다. 나는 한국 연수생으로 사계를 처음 방문했다. 대학 시절 교수님의 인솔로 사십 명의 젊은 한국 음악인들이 연수에 참여했다. 나는 ‘이주 동안 뮤지컬을 실컷 볼 수 있다’는 말에 여행 가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탔다.
일정 중에 특별 오디션이 있었다. 사계를 이끄는 아사리 게이타(淺利慶太) 회장이 참관했다. 다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눈치였지만 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내겐 그저 하나의 ‘경험’일 뿐이었다.
사건은 연수가 끝나는 날 있었던 환송연에서 벌어졌다. 파티 중에 아사리 회장이 통역을 대동하고 내게 다가왔다. 통역을 맡은 이는 김지현 선배였다. 선배는 극단 사계의 한국인 1호 배우로 한국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너 사계로 와라.”
아사리 회장이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런 제의에 당황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한테 물어보고요.”
통역을 맡은 선배가 잠시 머뭇했다. 나에게 눈짓으로 ‘진심이야?’하고 묻는 듯했다.
그때까지도 난 잘 몰랐다. 극단 사계가 어떤 곳인지……. 사계는 1953년 설립해 반세기 넘게 유지된 연극ㆍ뮤지컬 극단이다. 일본 내 9개의 전용극장을 가지고 있고,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가 1천 200여 명이다. 연간 총 공연 횟수가 3천 회, 관객 수가 300만 명을 넘는다. 요컨대, 일본 최고의 ‘대형 극단’이다. 그런 만큼 입단 경쟁도 치열하다. 한해 일본 내 뮤지컬 전공자들이 3,000명이나 지원을 하는데, 그들 중 60명만, 그것도 ‘연구생’으로 뽑는다. 통역을 맡은 김지현 선배만 하더라도 1,800대 1의 경쟁을 뚫었다. 그날 아사리 회장에게 내놓은 “엄마한테 물어보겠다”는 나의 대답은 ‘신문에 날 일’이었다.
첫 번째 오해가 나 때문이었다면, 두 번째는 아사리 회장에게서 비롯됐다. 극단에 들어와 이주쯤 지났을 때였다. 아사리 회장이 불쑥 연습실로 들어왔다. 배우 모두 일렬로 섰다. 아사리 회장이 간략한 훈시를 한 후에 줄 끝에 섰던 나를 가리키며 툭, 던지듯이 말했다.
“네가 공주다.”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홍본영은 공주다. 어머님은 분명히 한국의 왕족일 거야!’ 발언의 주인공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하고 물어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소문은 들불처럼 번졌다. (지극히 일본적인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만 모르는 사이에 나는 한국의 왕족이자 공주가 됐다.
생각해보면, 난 공주는 아니지만 공주처럼 자랐다.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키웠다. 어릴 때부터 늘 좋은 면을 부각시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자존감이 강한 아이로 자랐다.
자존감의 위력은 대학에서 폭발했다. 대학교 일 학년 때 동기와 선배들 사이에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노래 못 부르는 본영이.’ 지금 생각해보면 실력이 떨어지기로는 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나는 그런 소문이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해주던 말을 곱씹은 덕분이었다.
“오늘보다 내일 더 잘하면 되지 뭐!”
어머니의 말씀은 진리였다. 어머니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꾸준히 노력했더니 사 학년 때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그건 ‘실력이 가장 급성장한 성악과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소문이 교수님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 사계에서 다시 만난 ‘여장부’ 외할머니
하지만 사계는 차원이 달랐다. 너무 큰 산을 맞닥뜨렸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일본어를 모르는데다 뮤지컬도 낯선 장르였다. 게다가 격전장이 일본 최고의 극단이었다! 온실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히말라야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내 안의 ‘여장부’를 끄집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여장부’는 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165가 넘는 큰 키에다 귀티가 나는 용모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종종 말했다.
“사람이 복작대는 시장에 서 있어도 또렷하게 눈에 띄었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금세 눈에 들어왔지. 남자였다면 영락없이 장군감이었다.”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대구 남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원래는 황해도에서 사셨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온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을 오셨다. 그 시절 많은 피난민들처럼 시장에서 호구책을 찾으셨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북 말을 쓰는 ‘아주머니’에게 텃세가 심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물설고 낯설고, ‘말’도 선 시장에서 겪어냈을 신산한 일상을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저릿하다.
외할머니가 얼마나 알뜰하게 사셨는가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집에서 복어국을 끓여먹었다. 내장을 손질하면서 큰이모가 “알은 위험하니까 먹으면 안 된다”고 따로 빼놓았는데, 외할머니가 “아깝다. 늘 먹는 복언데 무슨 일이야 있을려구”하시면서 냄비에 다시 담았다. 그날 외할머니가 알을 가장 많이 먹었다. 식사 후 여느 날처럼 오순도순 앉아 있는데 외할머니가 “몸이 좀 이상하다”고 했다. 그리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며칠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사십대 초반의 나이에, 남편과 칠남매를 세상에 남겨둔 채였다.
포목점은 이모들이 맡았다. 이십대를 겨우 넘긴 어린 아이였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외할머니 못잖은 강단과 꼼꼼한 성격 덕에 시장에서 알아주는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 못 속이는 ‘피’의 힘을 이제는 내가 발휘해야 할 차례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외쳤다.
“그래, 내가 누구 딸이고 누구 손년데. 남문시장의 그 굳세던 ‘금순이’가 우리 외할머니였다고!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가 피난지보다 더하겠어?”
- 토오루, 지옥을 선물한 ‘선생님’
입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사리 회장으로부터 나에게 특별한 지시가 내려왔다. 토오루 선배에게 개인 교수를 받으라는 거였다.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귀여운 선배님요?”
나는 그때까지도 잘 몰랐다. 토오루 선배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사계의 전설적인 감초 단역배우인 동시에 가장 혹독한 선생님이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후배들은 그의 부엉이 같은 눈에 맞닥뜨리면 기가 질려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는 일 년 넘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늘 토오루 선배와 함께했다. 그는 혹독한 지도가 위대한 배우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특훈의 시작은 발음 교정이었다.
“다시 해봐. 와타시!”
훈련을 시작하던 날, 나는 세 시간 넘게 발레 바를 잡고 거울 앞에 서서 “와타시”를 반복했다. 선배는 “일본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발음하라”면서 계속 그 말을 반복하게 했다. 왜 일본어처럼 들리지 않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 못했을 것이다. 언어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발음의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내 스스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격하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춤이 너무 과격했다. 팔을 벌새처럼 흔들면서 동시에 발이 엉덩이에 닿도록 차올렸다. 그런 동작을 하면서 빠른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누가 볼까봐 겁났다. 봤다면 ‘쟤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고 쑥덕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건 효과적인 훈련법이다. 그렇게 훈련하고 나면 무대에서 아무리 격렬한 춤을 춰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토오루 선배가 왜 그런 훈련을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제자들에게 그 훈련법을 적용할 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한다. 이유를 알고 나면 조금은 덜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설명을 해주고 나면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다.
토오루 선배는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그 커다란 눈으로 나를 지켜봤다. 나는 그가 내는 다양한 숙제를 매일 매일 투쟁하듯 풀어야 했다. 속에서 단내가 올라오는 날들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내던 저녁시간이 너무도 그리웠다.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릴 때부터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거나 ‘장기자랑’을 했다. 외할머니 대부터 내려온 우리 집의 전통이었다. 어머니가 사회를 봤고, 동생들과 내가 차례차례 노래를 부르면 늘 칭찬 보따리를 한 아름 안겨주셨다.
저녁에 하숙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간혹 대학생이 된 뒤에도 머리맡에 앉아서 찬송가와 가곡을 불러주셨다.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 토오루 선배보다 훨씬 더 무서운 ‘그들’
그렇게 일 년 하고도 여섯 달이 흘렀다. 긴 터널을 지나 드디어 주연 데뷔를 허락받았다. 훈련이 끝나자 일본 전역에 있는 사계 전용관 게시판에 그간의 훈련과정과 성과를 담은 보고서가 게시됐다. 보고서는 토오루 선배가 작성했다. 아사리 회장은 보고서를 A3로 확대 프린트해서 게시판 옆에 다시 붙이게 했다. 나는 일본 전역에서 축하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더 무서운 과정이 남아 있었다. 토오루 선배보다 더 무시무시한 ‘교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객이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특별한 사연이 있다.
무대에 오르기 몇 달 전 성대에 이상이 왔다. 플립이라고 했다. 목소리를 갑자기 크게 내는 일이 잦다보니 성대가 뒤집어지는 현상이었다. 노래는커녕 말도 안 나왔다. 의사는 “목소리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술할까도 생각했지만 회복 기간이 너무 길었다. 수술대에 누우면 배역은 물 건너 갈 것이 뻔했다. 나는 일단 쉬기로 했다.
성대가 다시 소리를 내기까지 꼬박 이주가 걸렸다. 목소리가 돌아온 후에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매일 떨면서 주(週) 팔 회 공연을 소화했다. 한국 공연과 달리 두 명이 공동 주연을 맡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내가 목소리를 잃으면 대신할 사람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 나 대신 무대에 선다면 내 자리는 영원히 사라질 거였다. - 그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
공연이 시작된 후 나는 밤마다 울었다. 눈시울을 적시는 정도가 아니었다. 대성통곡을 했다. 일부러 엉엉 울었다. 울다 지치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은 ‘아이다’, 전 세계 뮤지컬 중에서 가장 화려한 역할이었다. 의상을 열 번이나 갈아입고 화장도 의상에 따라 바꾸었다. 아사리 회장의 ‘예언’대로 ‘공주 중의 공주’가 된 거였다. 그런 내가 밤마다 사형을 앞둔 죄수처럼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요컨대, 그 시절 나에겐 관객 한명 한명이 모두 토오루였다. 그들 모두 진짜 토오루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관객의 눈과 귀가 배우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라는 걸 그 몇 달의 공연에서 절절하게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풋내기 성악과 졸업생에서 진짜 뮤지컬 배우로 변신해갔다.
- ‘아시아’를 품은 어머니의 가슴
오 년 동안 사계의 주역으로 활동한 후, 2011년 한국에 돌아왔다. ‘투란도’의 주연을 시작으로 잠시 한국에서 활동했다. 일본에서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만족했다. 그 사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2014년, 나에게 새로운 문이 열렸다. 중국에서 초청장이 날아든 거였다. 그들은 중국 배우들을 가르칠 보컬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계와 한국 무대 모두에서 주연을 꿰찼다는 점이 중국 관계자들에게 어필한 듯했다. 나는 ‘제자들’을 만나러 중국으로 갔다. 그때 어머니가 나에게 예언 같은 말을 해주었다.
“중국 분들이 무대에 서달라고 요청할 거야. 넌 한중일 무대 모두에서 주연을 맡아본 유일한 아시아계 배우가 될 거다!”
어머니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내 노래를 들은 중국 관계자가 주연을 맡아달라고 했다.
뮤지컬 제목은 ‘상해탄’. 중국이 서양에 문을 열 즈음의 이야기로 만든 작품이다. 같은 제목의 드라마와 영화도 있다. 최초의 드라마 ‘상해탄’은 주윤발이 주연을 맡았는데, “방영 시간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인기작을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의 주연을 맡았다는 게 가끔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게다가 사계에서와 달리 홍보전단과 게시판에 내 이름(홍본영)을 쓰고, 그 옆에 한국인 배우라는 사실을 명기해놓았다. 볼 때마다 뿌듯하다.
지금은 완전히 안착했지만, 중국에서도 처음부터 모든 일이 술술 풀렸던 건 아니다. 나에게 보컬 지도를 받는 분들 중에는 나보다 나이와 경력이 훨씬 많은 분들도 있었다. ‘1급 배우’들이었다.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분들이라 갑자기 나타난 ‘어린’ 한국인 배우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밤마다 기도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나라도 불편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 관계자들이 스케줄을 조정해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다.
“제가 잘하면 되잖아요. 훌륭한 무대를 만들려면 가족처럼 친해져야 해요. 이것도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에요.”
나는 기도와 함께 어머니가 가르쳐준 비법을 썼다. 그건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편견 없이 자세히 보면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구석이 보인다. 사람마다 고운 마음과 장점이 있기 마련이거든.”
나는 그들의 연기나 노래에서 뛰어난 부분이 드러나면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들에게 말했다.
“그 대목이 너무 좋았어요. 관객들이 모두 감동했을 거예요.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주셨어요!”
더불어 “나에게 부족한 점이 없는지 알려 달라”고도 했다. 그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관객이라는 ‘토오루 선배’ 앞에 선 나약한 존재들이다. 배우는 ‘토오루’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들이 외면하면 우린 아무 것도 아니다. 존재감이 제로(無)가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린 모두 같은 입장이다.
나는 음악과 무대, 작품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공유하는 이상 갈등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결국 그 확신이 옳았다.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언제부턴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 중국인 ‘동지’들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내게 늘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내 어머니는 경북 경산에서 유치원을 경영한다. (지금은 아주 어린 아이들도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통합을 했다.) 어머니의 유치원에는 특징이 있다. 유난히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다. 장애아도 있다. 그렇게 운영하면 경영적인 측면에서는 손해를 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이 진짜 교육”이라면서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다 같이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쳐야지. 다양한 친구들과 섞이다보면 아이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거야.”
나도 내 어머니의 유치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땐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때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런’ 아이, ‘저런’ 아이를 모두 품어서 키웠다. 모든 것이 어머니 덕이다. 내가 한중일 삼국 모두에서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별 탈 없이 잘 섞인 것도, 어머니가 내 안에 심어주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비결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제 기능을 발휘해준 덕분이라고 믿는다.
또 하나 내가 어머니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음악’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잡아주셨다는 점이다.
나는 요즘도 고향에 가면 어머니의 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겨우 두 발로 일어서는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합창을 지도한다. 한번은 내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성악과에 다니는 대학생이 아니야. 프로들까지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야. 음악을 한다면,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공유해야 옳다. 이 아이들이 노래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니. 이것만으로도 네가 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이유는 충분한 거야.”
그런 다음 쐐기를 박듯 이 말을 덧붙인다.
“누가 알겠니, 이 아이들 중에서 세계를 감동시킬 위대한 음악가가 탄생할지.”
음악 자체를 사랑하라는 말로 들렸다. ‘음악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어머닌 ‘음악’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과 힘으로 살아가도록 늘 격려했다. 어린 시절 자장가를 불러주던 목소리에도 그 간절한 마음이 스며있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어머니의 기적이다. 아니 기적이 아니다. 내 어머니에겐 ‘불가능한 아이’가 없으니까.
10년 전쯤에 어머니 유치원의 아이들이 전국소방동요대회에 나가 금상을 탔을 때도 주변에선 “기적”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담담하게 “기적이 아니에요. 세상에 즐거운 마음으로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어요”하고 대답했다.
나도 어머니만큼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방법은 알고 있다. 잘 하는 부분을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칭찬해서 더 노력하도록 하고, 좌절할 땐 “오늘보다 내일 더 잘하면 된다”고 자신감을 심어주면 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영아, 사람은 누구나 기적의 씨앗을 품고 있단다!”
내 어머니가 날마다 증명하고 있는 ‘평범한’ 진리다. 더불어 내가 간절히 실현하고 싶은 ‘일상’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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