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1위 때 지정된 후 지위 유지
권한과 책임 비례하지 않아
금융당국 개입 여지 커지고
최대 채권은행과 이해상충 우려
정부가 위기에 빠진 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을 우선 채권은행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정작 이를 주도할 주채권은행의 여신 규모가 주요 기업마다 들쭉날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주채권은행의 책임과 권한은 여신규모에 비례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구조조정이 어려울 거란 지적도 나온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조선업계 ‘빅3’ 가운데 사실상 정부 소유인 대우조선해양을 제외한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주채권은행은 각각 KEB하나은행, 산업은행이다.
하지만 지난 2월말 기준으로 하나은행의 현대중공업에 대한 신용공여액(대출, 지급보증 등) 순위는 채권은행 가운데 5위(약 1조3,000억원), 산업은행은 삼성중공업 채권은행 중 6위(약 9,000억원)에 불과하다. 현대중공업은 수출입은행이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줬고, 이어 산업ㆍ우리ㆍ신한은행이 2~4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중공업도 수출입ㆍ하나ㆍ우리ㆍ농협ㆍ신한은행 순으로 여신규모가 크다.
통상 주채권은행은 기업에 대한 신용공여 규모가 가장 큰 은행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돈을 가장 많이 빌려준 은행이 받아야 할 돈도, 문제를 해결할 책임도 가장 크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수출입은행은 주채권은행을 맡을 수 없는 점을 감안해도 신용공여 규모만 놓고 보면 현대ㆍ삼성중공업의 주채권은행은 각각 산업은행, 하나은행으로 뒤바뀌어야 맞는 셈이다.
그럼에도 두 은행이 주채권은행을 맡고 있는 이유는 뭘까. 금융당국은 현대중공업이 오랫동안 옛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삼성중공업의 경우도 과거 산업은행이 신용공여 1위였던 시절 굳어진 주채권은행 지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기업 모두 현재 상태보다는 과거의 인연을 토대로 주채권은행이 지정돼 있는 것이다.
현행 규정상 다른 채권은행이나 기업이 요구할 경우 주채권은행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다. 다른 채권은행들이 주채권은행을 맡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A은행 관계자는 “주채권은행이 기업과 낮은 단계의 구조조정인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하고 여신을 유지할 경우, 나머지 채권은행들은 곧바로 여신을 회수하곤 해 주채권은행만 피해를 본다”며 “구조조정 과정에 쏟아지는 비난도 주채권은행을 꺼리는 이유”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구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신용공여 규모가 작아 상대적으로 책임도 적은 은행들이 주채권은행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될 경우 권한과 책임이 비례하지 않아 자칫 구조조정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헌 전 숭실대 교수는 “주채권은행 선정의 뚜렷한 기준이 없어 은행들이 서로 맡기를 꺼리는 사이, 금융당국이 구조조정에 개입할 여지도 커진다”며 “신용공여가 적은 은행이 주채권은행을 맡으면 책임감이 떨어질 수 있는 것은 물론, 최대 채권은행과 이해 상충도 생길 수 있어 신용공여가 큰 은행에 주채권은행을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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