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라, 마셔라, 진탕 취한 채 술집 테이블 밑으로 떨어져 본 게 언제던가. 숙취보다 먼저 뇌리를 할퀴던 전날 호탕하게 그은 신용카드 전표. ‘몸 버리고, 돈 버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던 가족들의 잔소리도 들어본 지 오래다. 술집을 전전하던 만취한 삶은 이제 매력을 잃은 걸까. 술집 아닌 ‘집술의 시대’가 열렸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주점업의 실질 성장세를 나타내는 서비스업 생산지수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반면 가계의 주류 소비지출은 역대 최고(월 평균 1만2,109원)를 기록했다. 만성적 경기침체, 개인주의적 문화 확산, 건강 중시 트렌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술은 각자 혹은 가족과 함께 집에서 먹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는 탓이다. 밥도 집밥, 술도 집술.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게 강력한 트렌드다. 그렇다면 ‘집안주’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자카야 못지 않은 ‘집안주’ 메뉴를 소개하기 위해 요리연구가 김은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씨는 최근 출간된 책 ‘홈 이자카야’(미호 발행)의 저자다.
소주, 맥주, 와인…당신의 집술은?
집술의 시대를 촉발한 요인 중 하나는 어떤 술이건 손 쉽게 쇼핑할 수 있는 유통망의 발달이다. 맥주 전문점에서나 먹을 수 있던 온갖 수입맥주가 대형마트는 물론 동네 슈퍼마켓에까지 구비돼 있고, 편의점만 가도 웬만한 와인이 있다. 소주, 막걸리, 청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사람들이 집술로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은 뭘까? 국내 양대 대형마트인 이마트와 롯데마트에 물었다.
이마트에 따르면, 올 1분기 이마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주류는 맥주. 전체 매출 중 41.4%를 차지했다. 2위는 와인으로 23.5%, 3위는 소주로 18.2%였다. 양주 9.2%, 민속주 7.7%가 뒤를 이었다. 롯데마트도 비슷하다. 3대 주종인 맥주와 와인, 소주를 100으로 했을 때, 맥주 매출이 50.5%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와인이 28.6%, 소주가 20.9%였다.
‘국민집술’ 맥주는 어떤 브랜드가 가장 인기일까. 구체적인 판매 수치는 영업비밀이지만, 수입맥주의 판매 순위는 공개된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 1월과 2월 가장 많이 팔린 수입맥주는 하이네켄이었다. 2위는 칭타오, 3, 4위는 각각 아사히와 호가든이 차지했다. 3월에는 중국맥주의 힘을 보여주며 칭타오가 처음으로 1위를 차지, 하이네켄이 2위로 밀렸다. 3, 4위는 호가든, 아사히 순이었다.
국내 맥주 시장에서 수입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40%로 아직까지는 국산 맥주를 더 많이 마시고 있지만 이 역시 조만간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올 1분기 맥주 전체의 전년 대비 매출신장률은 4.4%였던 데 반해 수입맥주의 매출신장률은 17.5%로 4배나 높았다. 주류 매출은 전체적으로 전년보다 3.9% 증가해 ‘집술’ 트렌드를 뒷받침했다.
집술이 대세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데이터는 육포, 족발 같은 안주류의 매출 증가다. 이마트에서는 육포가 전년 동기에 비해 25% 더 팔렸고, 자연치즈 역시 21.3%의 매출신장세를 보였다. 롯데마트에서도 족발이 25%, 튀김류가 17.1%, 구이류가 5.9% 전년 같은 기간보다 더 팔렸다.
집에서 치맥에 도전하자! 가라아게
하지만 만날 육포와 족발만 사다 먹을 순 없다. 간단하면서도 그럴싸한 집술의 친구가 필요하다. 요리연구가 김은지씨는 ‘국민집술’ 맥주 안주로 치킨 가라아게(닭튀김)를 먼저 추천했다. 집에서도 치맥, 그것도 고난도 일본식 치맥이 가능하다니. “닭과 맥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이죠. 치킨 먹다 다소 느끼하다 싶을 때 청량감 있는 맥주를 마시면 무척 잘 어울리잖아요. 치맥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에요.”
치킨 가라아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닭다리살 4개, 전분가루 1큰술, 박력분 1큰술, 계란 반 개, 식용류 약간이 필요하다. 한입 크기로 자른 닭다리살에 간장과 맛술 각각 1큰술, 참기름과 다진 마늘 각각 반 작은술, 다진 생강과 후추를 약간 뿌려 밑간을 한 후 30분~1시간 재워둔다. 전분가루와 박력분 계란을 섞어 밑간한 고기에 튀김옷을 입히고 식용유에 한 번 튀겨낸 뒤 기름기를 살짝 빼내고 다시 한 번 튀겨주면 끝이다.
이게 번거롭다면 5분만에 만들 수 있는 비장의 맥주 안주가 있다. 베이컨 숙주 볶음이다. “퇴근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만들어 먹기 가장 좋은 안주”라고. 달군 팬에 한입 크기로 썬 베이컨을 넣고 강불에서 볶다가 베이컨 기름이 배어 나올 때 숙주나물 한 줌과 굴소스 1큰술, 후추를 넣어 너무 숨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볶으면 된다. 밥을 곁들이면 간단한 식사에 반주로도 손색 없다.
와인 최고의 안주는 메론 프로슈토
와인 안주로는 치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조금만 발품, 손품을 팔면 더 격식을 갖춰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이탈리아 돼지다리 가공육인 프로슈토를 멜론을 썰어 감아 먹으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못지 않은 술자리가 된다. “와인 안주는 와인의 쌉싸름한 맛을 중화시키는 게 중요해요. 이때 과일만 한 게 없죠. 간단한 과일 안주지만 프로슈토햄 한 장만 얹으면 분위기도 좋고 맛도 좋아요.”
허기질 때나 간단한 모임일 때는 닭날개구이가 파티 분위기도 낼 수 있어 좋다. 닭날개 5개를 기준으로 할 때 데리야키 소스와 물 각각 3분의 1컵, 맛술 2큰술, 소금 후추 식용유 약간만 있으면 된다. 소금 후추 맛술을 닭날개에 뿌려 20분간 재운 후 식용유 두른 팬에 넣어 살짝 굽다가 데리야키 소스와 물을 넣어 끓이면서 졸인다. 중불에서 속이 전부 익을 때까지 충분히 익히는데, 소스가 너무 졸아들 땐 물을 조금 더 넣어 익히면 된다. 다소 양념이 있는 음식이지만 와인과 잘 어울린다.
소주에는 국물 안주가 찰떡궁합
“소주는 국물 있는 안주와 찰떡궁합이에요. 너무 맵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은 나가사키짬뽕 국물은 소주를 마실 때 속이 좀 더 편해지게 만들어줘요. 면이기 때문에 든든하게 한 끼 먹을 수도 있고요.”
집에서 나가사키짬뽕을 끓인다고? 시판용 사골육수와 라면 면을 이용하면 생각보다 간단하다. 소금물에 해감한 바지락과 내장을 제거한 새우를 볶다가 새우가 빨개지고 바지락이 입을 열면 사골육수를 넣는다. 청경채는 십자 모양으로, 어묵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고 육수가 끓으면 투하한 후 소금 후추로 간하면 국물은 끝이다. 라면 면은 따로 삶은 후 그릇에 담고 육수와 건더기를 얹어주면 된다. 혼자서 집술을 마시는 ‘혼집술족’에게 특별히 권하고 싶은 메뉴다. “그렇게 마시면 속 버려요.”
육식주의자라면 돼지고기 샤브샤브샐러드가 추천할 만하다. “돼지고기가 소주와 잘 맞아요. 좀 더 가볍게 소주를 즐기고 싶은 여성들에게도 좋은 안주고요. 칼로리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거든요.”
샤브샤브용 대패 삼겹살 150g에 양상추 반 줌, 적양배추 약간을 준비한다. 돼지고기는 데쳤다가 찬물에 헹궈 차갑게 두고, 양상추와 적양배추는 채 썬다. 여기에 청·홍 파프리카 각 4분의 1개를 잘게 다진 후 간장 3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식초 2큰술, 설탕 1큰술, 물 3큰술, 레몬즙 2큰술, 참기름 1작은술을 섞어 뿌려주면 된다. 집술이라고 김치, 과자랑만 먹을 필요는 없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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