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겠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발언 이후 국책은행 자본확충에 한은의 발권력 동원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정부는 ▦시급성 ▦통상 문제 ▦현금출자의 어려움 등을 발권력 동원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정부가 아전인수 격 주장을 내놓고 있는 건 아닌지 논란들이 적지 않다.
① 국책은행 자본확충, 얼마나 시급한가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해 돈을 댈 수 있는 곳은 정부(재정)와 한은(발권력)이다. 정부가 재정보다 발권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논거가 시급성이다.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요건에 해당되지도 않을뿐더러 지금부터 준비를 한다고 해도 수개월이 걸릴 수밖에 없는 반면,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 만으로 돈을 찍어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치상으로만 보면 산업은행의 경우 당장 자본 확충이 필요할 정도로 시급하지 않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4.28%로 상당히 양호한 수준이다. 자본확충이 필요하겠지만, 발권력 동원을 해야 할만큼 서두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수출입은행의 경우에는 “BIS비율이 3월 9.8%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선제적인 자본확충이 필요하다”(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책은행에 몇 개월 수혈이 안 된다고 당장 구조조정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며 “구체적인 구조조정 실행방안, 손실 규모 등이 확정돼야 자본 수혈이 시급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특히 “불과 한 달 전 총선 전까지만 해도 손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촌각을 다툰다며 발권력에 기대려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이필상 서울대 겸임교수)는 지적도 나온다.
② 재정 지원만 통상문제 소지 있나
정부가 재정 지원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는 통상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 재정으로 국책은행 자본확충에 나설 경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은이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한은의 발권력을 통한 지원 역시 통상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구조조정을 위해 중앙은행이 특정 기업에 특혜금융을 지원하거나, 중앙은행이 국책은행에 출자해 그 돈이 특정기업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면 이는 무차별 원칙 위반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의 경우 금리 인하 등 무차별적인 자금 공급에 나설 뿐, 특정 기업을 지원하는 사례가 없어 지금까지 문제가 된 적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도 “한은이 국책은행의 채권을 사거나, 직접 출자한 돈이 특정 기업에게 지원된다면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보조금으로 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③ 현물출자로는 안 되나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언론사 경제부장단 간담회에서 국책은행의 자금 지원과 관련, “유동성 공급보다 자본확충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국책은행들이 발행하는 채권을 사줘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보다 자본건전성을 강화해 지원 여력을 늘려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일각에서는 “그렇다면 굳이 한은 발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부가 현물출자에 나서는 방안이 있지 않느냐”(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고 지적한다.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전력 등의 주식을 출자해 국책은행의 자본금을 늘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현금출자와 달리 현물출자는 유동성 효과는 떨어지지만 자본확충에는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고, 더구나 현물출자는 국회 동의 없이 국무회의에서 결정하면 가능하기 때문에 신속한 집행도 가능하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의 현금ㆍ현물 출자, 한은의 발권력 등 가능한 모든 정책을 검토해 재원 마련에 나서야 한다”며 “한은에게만 구조조정 책임을 지게 할 경우 한은의 반발을 살 수 있고, 국민적 공감도 얻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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