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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대통령의 어려운 말

입력
2016.05.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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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야 놀자!”

30년쯤 전 내가 카피라이터가 되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신문광고의 헤드라인이다.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 친구랑 놀고 싶은 마음을 어릴 적 국민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롯데제과의 껌 광고였는데 등 뒤에 껌 하나를 숨겨 든 철이와 대문 뒤에서 눈을 빠끔히 내밀고 있는 순이가 5단 신문광고의 주인공들이었다. 어린이날 즈음에 신문에 실린 이 광고를 같은 팀에 있던 선배가 오려서 비닐 코팅을 해주었다. 광고인이 된 뒤 처음 집행된 후배의 광고를 축하하고 간직하라는 의미였다.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동네방네 돌려 읽게 한 것처럼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했다. 내가 썼다는 사실을 나만 아는, 열 줄도 안 되는 광고문안을 며칠 동안 읽고 또 읽었다.

카피라이터가 되어 직능교육을 받을 때 처음 그리고 가장 자주 듣는 소리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써라’하는 것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물리학자 이종필 박사는 힉스입자나 상대성 이론을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무식한 사람들 때문에 가끔 곤혹스러워하지만, 광고메시지는 쉬워야 한다. 쉬워야 알아듣고 공감하고 지갑을 연다. 광고문장의 길이는 짧아야 한다. TV 광고의 경우 길어야 30초, 대부분은 15초이니 만연체로 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신문이나 잡지도 헤드라인을 포함해 길어야 열 줄이 고작이다. 전체의 길이도 짧아야 하지만 한 문장의 길이도 짧아야 한다. 그러니 대명사나 부사, 형용사를 남발하는 것도 금기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광고 카피를 쓸 때는 단어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해야 했다. 내가 쓰는 문장을 대중에게 노출하기 위해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생각하면 문장 한 줄 한 줄을 아껴야 했다.

짧고 간결하고 쉽게. 이것이 카피라이터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 능력이다. 물론 나도 가끔 광고에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 문장을 써야 할 때도 있다. 사전 검열에 가까웠던 광고심의를 피해가기 위해서 에둘러 말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였다. 지금은 없어진 광고심의에는 어처구니없는 규제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거 먹어 볼래?’라는 표현은 소비자에게 반말했다는 이유로 기각되기도 했다.

직업으로 몸에 밴 습관 탓인지 나는 짧고 쉬운 문장이 좋다. 행간에 다른 뜻이 숨은 글이나 대명사, 부사가 요란하고 길게 늘어지는 말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직업이 아니라 나이 탓이라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특히 뉴스에 나오는 높은 분들의 말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며칠 전 기자간담회 중에 대통령이 전월세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전월세 가격을 어떻게든지 낮추고 이런 차원으로만 가서는 절대로 집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중략) 부족하면서 월세로 옮겨가고 이렇게 해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물론 대증요법으로 그것이 너무 국민들한테 고통을 주니까 그때마다 대증요법식으로 정책을 펴기는 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임대형 주거에 대한 개념도 바꿔서 임대형 주택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임대형 주택을 많이 만드는 것이 근본적으로 국민의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해서...’ 이사하고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2억이나 오른 전세아파트에 살고 있기에 뭔가 뾰족한 해법이라도 주셨을까 하고 몇 번이나 신문기사를 읽었지만, 엄청난 전셋값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작은 힌트도 찾을 수 없었다. 사전 심의도 없는데, 초등학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같은 보통 시민이 이해하기 쉽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한 문장을 쓰려고 밤을 지새우고 전셋값 걱정에 불면을 겪는 내 처지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거기 더해 대통령의 어려운 말까지 해석하려고 애써야 하니… 보통 시민의 할 일이 참으로 끝이 없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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