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충정로 어느 출판사 옥상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이국적인 붉은 벽돌집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담장과 굳게 닫힌 대문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눈에 띄었다. 뾰족한 다각형의 튜렛(turret, 작은 탑 형태의 부속건물)과 베란다를 가진, 단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돌집이었다. 충정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지만 오래된 동네 안이라 존재감을 드러나지 않던 이 집은 어느 날 중국식당을 연상시키는 ‘충정각’이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식당으로 거듭났다. 반가운 마음에 틈나는 대로 이 집을 찾았고, 곧 단골이 되었다.
그러나 100년 가까이 된 집일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 누가 지었고 누가 살았는지 등에 대해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던 중 허유진이라는 젊은 건축학도의 연구로 미국인 맥렐란(R.A. McLellan)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897년 출범한 대한제국이 추진한 근대국가 프로젝트 중에는 대중교통인 전차 부설이 있었다. 서울의 전차 부설은 한성전기회사가 맡았고 그때 들어온 미국인 엔지니어 맥렐란이 교회당이나 선교사의 전유물이던 붉은 벽돌집을 세웠던 것이다.
이후 여러 명의 집주인을 거치면서 넓었던 대지가 몇 개로 나뉘기도 하고 약간의 증축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9각형의 튜렛을 가진 현관, 전면의 베란다 그리고 검은 벽돌을 악센트로 사용한 창문 등은 1900년대 초 벽돌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튜렛의 현관을 들어서면 벽난로가 있는 홀이 있다. 홀 양쪽으로는 베이윈도우(bay window, 돌출 창)가 설치된 거실과 식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당에는 옛 주인의 취향을 보여주는 석물과 석탑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집주인은 아마도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주변의 넓은 땅을 관장하며 근사한 풍경을 감상했을 것이다. 초기에는 벽난로가 집 난방을 담당했다가 후에 따뜻하게 데운 공기를 각 방에 공급하는 온풍식 보일러가 설치됐다.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외국인에 의해 탄생한 벽돌집은 다행히 100년이 넘은 지금도 서울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 때 낙후된 주변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이 집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매우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 근사한 갤러리를 겸한 이탈리아 식당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장소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이 집이 지켜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역사를 과격하게 밀어내는 데만 익숙했던 도시재개발 사업이 근대유산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집을 지켜내는 건 단순히 우리 근대사의 현장을 지켜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붉은 벽돌집을 간직하는 건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파란 눈의 이방인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안창모 경기대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