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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복자 심사 첫 단계 통과했다

입력
2016.04.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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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1821~1861) 신부.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1821~1861) 신부.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천주교 역사상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1821~1861년) 신부가 교황청 시성성의 성덕 심사를 통과했다. 복자로 추대되기 위한 두 심사(성덕ㆍ기적심사) 중 첫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28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최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교황청 시성성 결정을 승인했다. 최 신부를 가경자(可敬者ㆍ복자 후보자의 잠정적 존칭)로 선포했다.

이는 2009년 교황청에 시복이 신청된 지 7년만의 결정으로, 순교자가 아닌 한국 인물의 시복 심사가 진전을 이룬 것은 처음이다. 그간 한국에서 성인과 복자로 추대된 것은 각각 103명, 124명으로 모두 순교자다. 복자는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공경할 대상이 된 신도로, 복자가 되면 재심사를 거쳐 성인으로 추대된다. 복자는 지역 교회 단위에서, 성인은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모범으로 삼아 공경한다.

최 신부는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방제(1837년 열병으로 사망),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1849년 상하이에서 조선인 중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다. 1846년 병오박해로 처형당한 김 신부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피의 순교자’로 알려졌다면, 11년 6개월간 박해의 위험 속에 쫓겨 다니며 숨어있는 신자들을 만나고 신학생들을 지원한 최 신부는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1821년 3월 충남 청양 다락골 인근에서 태어난 최 신부는 김 신부와 함께 마카오, 만주 등에서 유학했다. 밀사들로부터 앞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 신부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몇 차례 귀국을 시도했으나 실패 해 중국에서 현지 신자들을 만났다.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고 밀사들의 도움으로 귀국했고, 전국에 숨어 있는 신자 공동체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줬다.

쫓겨 다니는 중에도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았다.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는 한편 조선 신학생을 유학 보내기도 하며 조선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61년 경남 지방 사목을 마치고 주교에게 결과를 보고하러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쳐 6월 15일 마흔의 나이로 선종했다.

주교회의 관계자는 “이번 심사는 2005년부터 4년간 이어진 13번의 회의와, 2009년 이후 교황청의 심사를 거쳐 7년 만에 나온 결정”이라며 “최 신부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1년에 복자품에 오르길 기대하지만 전례 등에 비춰봤을 때 남은 단계의 기적심사는 다시 10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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