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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칼럼] 부와 권력이라는 저주

입력
2016.04.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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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여권 참패에 대한 여러 분석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 키워드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분노’. 권력자의 전횡과 폭정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그야말로 불처럼 일어나 판을 엎어버리는 것은 역사상 도도하게 흐르는 큰 물결이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왕조가 수십년 만에 끝났던 예를 들자면 지면이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부와 권력을 쥐게 되면 이런 명백한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변화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적인 분석만 초점을 맞추자, 우선 자신과 자기 집안의 특별함에 대한 자기애적 확신이다. 태어날 때부터 왕자와 공주로 태어났건,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건, 일단 권력이나 돈을 크게 부여 잡게 되면 “나는 다른 사람과는 모든 것이 다른 예외적 인물”이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게 된다. 능력 면에서나, 애국심이나 성실성 모두 타인들을 훨씬 능가한다는 때론 과대망상적 확신의 ‘초능력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한 자기애적 성향을 부풀리게 만드는 성장과정도 있다. 부모가 너는 “특별하다” “똑똑하다” “어떡하든 다른 사람을 이겨야 한다”라는 식의 세뇌만 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겸손과 배려는 배워 주지 않는데다가, 도덕이나 양심은 경쟁에서 필요하면 버릴 수 있다는 식으로 교육했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욕망에 따라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둘 것이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 없는 지배근성(Fearless Dominance)에 젖으면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번질 수 있다. 실제로 성공의 극점에 있는 이들에게서 많이 관찰되는 현상이다. 주변 인물들의 감언이설도 한 몫을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이지만 독재적 부모 밑에서 남모르는 상처와 고립감을 갖고 성장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매우 낮은 자존감이 숨어 있어서 남이 하는 아부에만 몰입하기도 한다. 칭찬만 들어야 안심할 정도로 자신감이 없는 것이다. 사과하고 미안해 할 줄 모르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형성과정과 비슷하다. 두목이 감방에 가지 않는 한 절대 바른 말하지 않는 조폭사회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권력과 부가 넘치면, 소소한 일상의 좌절과 아픔을 겪지 못하는 고통 결핍(Lack of suffering)의 상태가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평범한 생활인은 불편과 좌절을 겪으면서 인내와 공감을 배운다. 지옥철을 타 봐야 직장에 도착 전에도 지쳐 버리는 생활인의 애환을 알고, 퇴근 후 밀린 집안일에 집에 돌아가기 싫은 심정이 되어 봐야 애 키우는 맞벌이 부부들의 고충을 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진상 손님께 봉변을 당해 봐야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울분을 참고 사는지 감이 온다. 죽어가는 가족이 응급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설움을 겪어 봐야 부조리한 의료제도가 얼마나 사람들을 서럽게 하는지 절감한다. 하지만 이런 크고 작은 고통의 기억들은 비슷하게 아프고 힘든 다른 이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로 발전하는 질료가 된다. 자신의 아픔이 사회전체의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각성도 찾아올 수 있다.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동기가 된다. 특권 속에 성장하고 생활하는 이들은 이런 소중한 기억이 없으니,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빼앗아 갈 것처럼 보이는 이른바 종북 좌파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만 있다.

재미있는 것은 특별한 집안의 특별한 인물에 대해 평범한 대중들이 애정을 보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노숙인이 억울하게 죽었을 때는 관심도 없는 대중들이지만 다이애나 비가 죽었을 때는 추모물결이 대단한 이유다. 빈곤층 노인들이 청와대의 고아(?) 대통령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대단한 사람을 아껴주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본인의 삶과 상관없이 기왕이면 멋진 이와 동일시해야 자신이 덜 비참해 보인다. 또 앞으로 혹시라도 벌지도 모를 재산을 잘 지켜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도 있다. 장애인, 다문화 출신, 노동자들 보다는 일단 성공한 이들로 비례 대표가 채워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도자들의 도덕적 품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빠르게 사라지는 추세다. 심지어는 선함을 지향하겠다는 것은 위선이고, 욕망대로 하겠다는 이기심은 정직한 것이라는 궤변도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권력자와 부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많은 이들이 손가락질하지만, 대중 역시 도덕적 삶을 동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담합은 오래 가지 않는다. 권력층이 계속 폐쇄적 행보만 계속하면서 분노가 폭발하는 임계점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낙하산 인사 등 철저하게 그들만의 리그를 계속하니, “동일시”라는 넉넉한 감정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탓이다. 브라질 대통령 탄핵, 유럽 사회주의 정당집권, 대만 대선에서 차이잉원(蔡英文)의 승리, 금수저인 트럼프의 대중 도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국민들의 배신감과 분노와 소외감이 파괴적인 쪽이 아니라 건설적인 쪽으로 변환될 수 있도록 길을 터 줄 것이다. 알려진 동화 ‘왕자와 거지’처럼 거지들의 서러운 삶을 경험해 본 다음에야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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