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가세(家勢)를 반영하듯 위태롭게 기운 무대 한 켠, 벤치에 누워 자던 남자가 굴러 떨어진다. “어이구 세 시간이 넘었네.(…)기차역으로 마중 나가겠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는 그냥 잠들어 버렸어.” 맨발의 남자는 주섬주섬 양말을 신고 노란 구두 속에 발을 집어넣는다. 농노의 아들 로파힌은 지금 5년 만에 돌아오는, 아버지가 모셨던 지주 집안의 딸과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은 대대로 농사꾼이었어. 내가 지금 이렇게 쫙 빼 입고 있지만, 이게 어울리나! 지금은 어쩌다 돈이 많아져서 그나마 부자 소릴 듣고 대우 받는 거지.” 벚꽃동산의 주인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가 영지로 돌아오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벚꽃동산’이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창단 30주년 기념작으로 5월 15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10대 고등학교 시절 읽은 ‘벚꽃동산’을 언젠가 무대에 올리고 싶다”며 연극인을 꿈꿨던 이윤택 예술감독이 이순이 넘어 처음 이 작품을 60석 소극장 연극으로 연출했다. 이 감독은 연출의 글에서 ‘지금 나와 맘 편하게 연극할 수 있는 배우들과 무대 스태프들로 이 정도 표현해 내는 것, 이게 내가 꿈꾸어왔던 연극 세계’라고 썼다.
경제적으로 이미 바닥을 드러냈으면서도 낭비벽을 버리지 못하는 지주 집안을 통해 19세기 러시아 귀족사회의 몰락을 그린 희곡을 극단 특유의 풍자적인 해석으로 풀었다. 변혁의 시대에 달라진 인물 군상들의 지위는 의상으로, 그럼에도 뼈 속 깊이 새겨진 귀족과 농노, 인텔리의 습성은 구두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젊은 지식인 페차는 낡아빠진 외투와 외투만큼 닳은 검은 구두로, 부농 로파힌은 노란 가죽 구두로, 귀족이지만 실용적인 성격의 아냐는 굽이 낮은 흰 구두로 은유하는 식이다. 지난 부귀영화의 추억에 갇혀 사는 여지주 라네프스카야가 무도회에서 신은 구두는 발목이 꺾일 듯 위태롭다.
감상적 비극으로 소개된 기존 작품 해석에서 탈피해 극단은 벚꽃동산 해체 이후 인물들의 삶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다. 예컨대 원작을 살짝 비틀어 로파힌이 벚꽃동산을 경매에서 낙찰 받은 후 비참했던 과거를 읊조리며 라네프스카야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낡은 것(지주)과 새로운 것(부농)의 조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동산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장막 사이 배우들은 집시로 변해 무곡을 부르고, 페차는 지붕에서 사다리를 타고 등장하는 등 지루하게 늘어질 수 있는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극단 대표 김소희가 라네프스카야를, 배우 윤정섭이 로파힌을 맡아 압축적인 문어체 대사를 일상의 언어로 길어 올린다. 가예프의 박일규와 이승헌, 페차의 오동식 등 극단을 대표하는 배우들의 호흡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십 수 년 동고동락해 온 힘이다.(02)763-1268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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