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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카스피해… 양국 "카라바흐는 우리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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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카스피해… 양국 "카라바흐는 우리 땅"

입력
2016.04.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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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군인이 7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마르튀니 마을 인근에 배치한 탱크 옆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아르메니아 군인이 7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마르튀니 마을 인근에 배치한 탱크 옆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4월 초 카스피해에서 핏빛 비보가 날아들었다. 사방에 러시아, 터키, 이란이라는 대국에 둘러싸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군대가 국경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유혈 충돌을 일으켰는데 양국은 나흘 간 전투로 100여명의 사상자를 남긴 끝에 정전에 합의했다. 이름도 생소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격전을 치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카라바흐는 누구 땅인가

유라시아 대륙 정중앙의 양국이 국경을 맞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0만 아르메니아인들이 합심해 지키려는 나고르노카라바흐(카라바흐) 지역은 이웃 국가 아제르바이잔 내 약 14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는 자치 구역이다. 국제법으로는 아제르바이잔이 영토 주권을 인정 받았지만 카라바흐 주민의 95%는 스스로를 아르메니아인으로 생각한다. 25년 전인 1991년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분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99%의 찬성 표를 던진 주민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NKR) 건설을 선포한 후 아르메니아로 합병을 추진 중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주요 도시인 스테파나케르트 시민들이 5일 아르메니아 국기와 촛불을 들고 희생 군인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주요 도시인 스테파나케르트 시민들이 5일 아르메니아 국기와 촛불을 들고 희생 군인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6-04-22(한국일보)
2016-04-22(한국일보)

아르메니아 국민들도 오랜 역사를 무기로 카라바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이슬람교 영향력이 강한 캅카스(러시아 남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지역에서 고대 왕국부터 기독교를 수용해 독자적인 민족성을 쌓아 온 나라로, 현재 아제르바이잔 영토선이 구축되기 오래 전인 4세기부터 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인의 거주지였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가 카라바흐 지역 예산의 35%를 감당하고 있는 가운데 예레반에 사는 에드가 네르시스얀은 “아제르바이잔이 카라바흐를 그들의 영토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곳은 조국(motherland)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련 붕괴 이후 전쟁까지

하지만 NKR의 분리 독립 선언은 국제사회의 승인을 전혀 받지 못했다. 20세기 구소련 통치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의 영유권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약 70년 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쥐었던 구소련 연방정부는 카라바흐의 분리 요구를 묵살한 채 아제르바이잔 내 잔류를 결정하며 1924년 11월 카라바흐에 자치주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분란을 봉인했다.

구소련이 붕괴 조짐을 보인 88년에 이르러서야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본격화했고 같은 해 2월 주도인 스테파나케르트에서는 아제르바이잔 경찰과 유혈 충돌로 번져 50여명의 아르메니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갈등은 4년간 지속되다 92년 양국 군사가 동원된 전쟁으로 이어졌고 아제르바이잔군에 의해 아르메니아인 4만여명이 사살되는 사태로 치닫게 된다. 전투는 94년 5월 양국 국방장관과 카라바흐 아르메니아군 사령관의 휴전 합의로 마무리됐으나 이후 소규모 충돌로 주민 및 군인들의 희생이 이어졌다.

여기까지 보면 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방적 횡포로 인한 참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측도 억울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카라바흐 내 아르메니아인 비율이 처음부터 95%였던 것은 아니다. 구소련 해체 직전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은 75%, 나머지 25%는 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 인구비를 극단적으로 바꾼 것은 92년 전쟁이다. NKR과 아르메니아군은 전쟁 동안 인근 도시들을 점령, 아제르바이잔인 75만여명을 내쫓아 카라바흐 지역을 초기 규모의 배로 넓혔다. 카라바흐 자치주 인근의 아그담시는 15만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고향이었지만 93년 7월을 기점으로 유령 도시가 됐다. 아르메니아군은 아제르바이잔이 도시를 재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민들을 빈손으로 쫓아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의 카라바흐 ‘불법 점거’를 주장하는 데는 우방국 러시아의 역사와도 연관돼 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 남방 진출의 요충지인 캅카스 지역을 두고 터키, 이란과 패권 다툼을 벌인 끝에 투르크만차이조약으로 독점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당시 카라바흐를 안정적으로 장악하려던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켜 아르메니아 우세지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제르바이잔 측의 주장이다. 결국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확장, 아르메니아ㆍ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적 상호 침탈이 지금의 카라바흐 분쟁을 완성시킨 것이다.

하지만 분쟁의 씨앗을 틔운 러시아는 국제사회를 결집시켜 분쟁 중재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92년부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내 미국, 프랑스와 공동 의장국을 맡는 실무 그룹인 ‘민스크그룹’을 구성, 카라바흐 지역에 평화유지군 배치를 통한 단계적 분쟁 해결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같은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달리, 미국과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의 풍부한 지하자원 및 인종적 유대를 염두에 두고 연대를 강화하고 있어 이해관계만 복잡하게 얽혀 가고 있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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