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에는 으레 김밥이 따라붙었다. 적어도 30년 전부터 그랬다. 점심시간이 되어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열면 김밥이 나왔다. 소풍 간다고 얻어 입은 새 옷은 제각기 알록달록하게 다른 색을 내고 있었지만 도시락 속 김밥만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간장에 졸인 우엉, 볶은 당근, 데친 시금치, 달걀지단, 거기에 단무지. 다진 소고기 볶음 아니면 김밥용 햄을 넣는지 소시지를 넣는지, 아니면 맛살이나 어묵을 넣는지 정도가 달랐다. 오이나 김치도 옵션이긴 했다. 가계부 여유에 따라 치즈도 추가되긴 했다. 집집마다 크게 다른 것은 차라리 손맛뿐. 기본 틀이 같으니 맛도 대동소이하다. 가가호호 새벽부터 분주했던 모양이지만 그래 봐야 상향평준화요, ‘그 밥에 그 나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밥이 조금 달라졌다. 참치 통조림과 마요네즈를 비벼 깻잎 향까지 곁들인 참치 김밥이 혁명적이었고 멸치볶음, 돈까스, 샐러드 김밥까지 등장했다. 유부를 넣은 김밥도 꽤나 새로웠다. 서울 방배동 토박이에 따르면 유부김밥의 원조는 방배동. 1980년대 남부종합시장 지하에 유부김밥집이 여섯 곳 쪼르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밥은 고전적인 틀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사실 가장 완벽한 조합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다 향이 달콤하게 살아난 구운 김.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의 짭조름한 소금 간에 향을 더하고 부패를 막는 참기름. 달걀지단의 고소한 맛과 시금치의 달고 쌉싸름한 맛, 우엉의 짭짤하고 고소한 맛, 당근의 단맛에 육류에서 나오는 기름진 맛, 단무지의 달짝지근한 신맛까지 다 들어있다. 입 안에서 풀어지는 밥의 부드러움부터 당근, 우엉, 단무지 같이 단단한 재료가 가진 씹는 맛까지, 질감조차도 다 가졌다. 한 입 안에서 신맛 단맛 짠맛 쓴맛 고소한 맛 감칠맛이 고루 어우러지고 부드러움부터 아삭함까지 다양한 질감이 지나간다. 김밥은 이미 어지간히 완성된 음식이다. 하지만 사람이 모차르트만 듣고 살 수는 없는 법. 종종 빅뱅이나 레드벨벳도 듣고 싶은 법이다.
경향각지에서 일어나는 김밥의 호쾌한 진화
인류 유전자가 억센 진화를 거듭해온 것처럼, 김밥의 진화 역시 게으를지언정 완전히 끊인 적은 없었다. 고전음악 안에서 현대음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김밥 역시 고전에서 명맥을 잇는 진화상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제주도 오는정김밥에는 튀기듯 볶은 유부가 들어간다. 같은 서귀포 올레시장 꽁치김밥은 구운 꽁치 한 마리가 통째로 발골된 채 누워있다. 전주 오선모옛날김밥은 달달하게 볶은 당근을 듬뿍 넣어 승부를 본다. 달걀로 승부 보는 김밥도 있다. 경주 교리김밥은 달걀지단을 가늘게 채쳐 꽉꽉 넣는다. 가늘기로는 서울 방배동 서호김밥이 내놓는 다시마김밥에 들어가는 다시마채도 못지 않다. 원래는 유부김밥 계보를 이었는데 몇 해 전 다시마김밥을 신제품으로 냈다. 연희동 연희김밥은 화학적인 매운 맛이 속을 통쾌하게 훑고 지나가는 오징어꼬마김밥이 가장 인기다.
망원동 보물섬김밥에도 매콤하게 양념한 오징어채가 들어간 얼큰이김밥이 있다. 명태포를 매콤한 양념에 무쳐 넣는 상수동 연우김밥도 독특하다. 동교동에 본점이 있는 찰스김밥은 숯불김밥으로 유명해졌는데, 치킨샐러드김밥도 못지 않은 인기메뉴다. 서교동 제이김밥은 집밥 느낌이 물씬하다. 묵은지김밥, 취나물이 들어간 나물김밥에 계절 메뉴로 어수리김밥과 매실장아찌김밥도 한다. 부산 출신인 고봉민김밥의 돈까스김밥이 전국에 퍼졌지만 좀더 놀라운 김밥 속이라면 신사동 루비떡볶이의 루비수제소세지김밥을 꼽을 수 있다.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탈장르적인 김밥의 계보도 물론 쉬지 않았다. 어부의 도시락이었다가 통영의 향토요리가 되어 관광산업에 이바지하는 충무김밥이 역사가 깊고, 국제적인 명성의 관광지가 된 광장시장의 간판 메뉴인 마약김밥도 삼일고가도로 아래서 흔히 팔던 것이 광장시장 안으로 번져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얇은 달걀지단을 겉에 만 봉천동 진순자계란말이김밥이 한입 크기 김밥의 시장을 열었다면, 스쿨푸드는 다양한 레시피로 시장의 파이를 넓혔다.
김밥, 특이점 넘어서다…경천동지 레시피
완성된 것은 고전이 되어 뒷방으로 물어나기 마련이다. 세상은 더 새로운 것을 원하게 설계돼 있다. 특이점(Singularity)을 지나며 혁신이 찾아오듯, 김밥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그 혁신은 사족보행하던 인류가 직립한 것만큼 과감할 필요도 있다. 김밥이라서 그렇다. 서양에서 햄버거 등 샌드위치가 정찬을 대신하는 빠른 식사를 담당하는 것처럼, 한국의 김밥 역시 식사할 틈 없이 바쁜 이들의 주된 식량원이다. 그 식량원이 매일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면 좀 서운하다.
이미 등장한 김밥 중 김밥의 특이점, 혹은 특이점으로 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는 것이 서울 압구정동 리김밥이다. 2012년 문을 연 이 김밥집은 “기왕 하는 일인데 남들 다 하는 것을 똑같이 하면 지는 기분이었다”는 말대로 오기 있게 경천동지할 레시피들을 만들어냈다. 형태부터가 특이점다웠다. 딱딱한 속재료를 죄다 잘게 채 썰어버렸다. 2013년 시작된 프리미엄 김밥 붐에서 시작된 김밥들이 모두 그 스타일을 추종하고 있다. 고전적인 김밥 체인점들 역시 이제 속재료를 잘게 채 썰어 넣는다.
스물여섯 가지 김밥 메뉴마다 들어가는 속재료 구성도 자유롭다. 지당히 들어가야 했던 재료를 과감히 생략하는가 하면, 김밥에 감히 못 들어가던 속재료가 새로운 맛을 내기도 한다. 매콤견과류김밥은 당근을 뺐고, 버섯불고기김밥은 단무지가 생략됐다. 들큰한 슬라이스 체다치즈 일색이던 치즈김밥에 고다치즈나 애덤치즈를 사용해 쿰쿰한 서양 맛을 더했고, 파프리카를 듬뿍 넣어 샐러드 먹는 듯한 맛을 내기도 했다. 새로워지기 위해, 전체적인 조화를 해치는 속재료를 빼고 의도한 맛을 내는 데에 필요 없는 재료도 제외했다.
이제 새로운 김밥은 더 이상 없을까? 답은 자명하다. 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김밥의 본질부터 볼 필요가 있다. 김밥이 무엇인가. 밥과 여러 가지 반찬의 맛이 다양한 맛을 내면서도 서로 잘 어우러지도록 조합해 김에 싸서 말고 먹기 편하게 썰어 휴대하는 음식이다. 밥이 있고, 반찬이 있고, 그것을 김으로 싸서 먹기 편하게 만들면 그것이 다 김밥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쿨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새로워지기가 쉽다. 우리가 쌀밥을 먹을 때 좋아하는 반찬 구성이 그대로 김밥이 되면 된다. 이를테면 스팸 한 조각에 젓갈과 달걀 프라이, 알맞게 신 김치 한 점. 혹은 굵은 소금을 뿌려 구운 삼겹살에 제주도식 멜젓과 구운 마늘, 무채에 깻잎과 상추쌈. 아니면 얼얼한 주꾸미볶음에 콩나물무침과 부들부들한 계란찜. 어떤 것이든 좋아하는 식단대로 김밥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다만 김밥이라는 하드웨어에 맞도록 김밥용 레시피로 전환하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김밥이 김밥다우려면 딱딱한 재료는 채 쳐야 하고, 수분이 많은 재료는 건조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미 날씨는 풀릴 대로 풀려 밖으로만 나돌게 되는 때다. 5월에는 더욱더 밖으로 나갈 일이 잦아진다. 기왕 나서는 길, 어차피 새벽부터 분주하게 싸야 하는 김밥이라면 조금 색다르게 준비해보면 어떨까. 매일 먹는 김밥이 처음 먹는 김밥이 된다면 그 또한 봄 나들이마냥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시도는 걸작이 되기도, 망작이 되기도 하겠지만 하루쯤 어떠하리. 어차피 평생 먹은 그 뻔하고도 완벽한 김밥 맛이야, 그대로 그 자리에 영원한 고전으로 머물고 있을 테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세상에 없던 김밥 레시피
선재스님 아래서 사찰음식을 수학한 바 있는 요리사 토니유는 신사동의 한식 레스토랑 ‘이십사절기’ 오너 셰프다. 야생 재료 사정에 밝은 그가 추천한 김밥 속재료는 엄나무순. “고기에 등급이 있는 것처럼 나물에도 등급이 있다면 엄나무순이 1++A등급”이라며 추천했다. 엄나무순은 개두릅이라고도 부르는데, 막 시장에 올라온 참이다. 엄나무순은 아삭한 식감을 살려 데쳐 넣거나 튀김을 해서 넣는데, 다른 재료는 모두 생략하는 대신에 밥에 간장으로 양념을 해 밸런스를 맞춘다. 허전하다 싶다면 가늘게 채 썬 우엉을 간장에 졸여 넣는 것도 방법이다. 이때 밥의 간장 양념은 생략한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상영 역시 봄나물을 김밥 속 재료로 추천했다. “흔히 반찬으로 먹는 봄나물보다는 잘 먹지 않았던 봄나물을 사용해보세요. 반찬으로 먹을 때보다 훨씬 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요.” 그의 추천은 원추리나물이다. 반찬으로 하면 설핏 질길 수 있는데 김밥에 넣으면 한 입 두께로 썰어 먹으니 식감이 한결 편해진다. “원추리나물과 함께 얇게 채친 당근, 우엉채, 시금치, 버섯, 고기 등을 넣고 당면을 만들어 속에 마는데, 김밥에 이미 밥이 있기 때문에 당면 양을 적게 하고 밥 양도 동시에 줄여야 균형이 맞지요. 좀더 다채로운 향을 원한다면 냉이도 함께 넣어 보세요. 단무지를 넣어 씹는 맛을 더하되 얇게 채쳐서 넣고요.”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은 심플하지만 풍부한 맛을 내는 김밥 레시피를 추천했다. “우엉을 얇게 채쳐 간장, 맛술, 설탕에 졸이다가 마지막에 가쓰오부시, 통깨를 듬뿍 넣고 마무리해 속 재료로 사용해보세요. 달걀지단, 오이, 당근, 단무지, 장아찌를 곁들여 말면 거창하지 않아도 풍부한 맛을 낼 수 있죠.” 또 그는 시판 재료로 낼 수 있는 간편한 김밥도 떠올렸다. 시판 훈제오리 구이와 쌈무, 달걀지단, 오이, 당근이 들어가는데 쌈무를 여러 장 겹쳐 넣어 새콤한 맛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다. 미나리를 데쳐 넣어 향을 가미해도 오리와 잘 어울린다.
한남동 레스토랑 ‘앤드 다이닝’을 이끄는 장진모 셰프는 재료에 한껏 힘을 줘 가장 간단한 레시피의 김밥을 추천했다. “성게알과 해삼 내장을 넣은 달걀말이와 식초, 설탕, 소금으로 간한 밥의 조합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죠.” 달걀말이를 할 때 우유에 달걀을 풀어 부드럽게 조리하는 것이 이 간소하지만 군침 도는 김밥의 포인트다. 성게알과 해삼 내장의 농후한 맛이 산미와 어우러지는 초밥 스타일의 김밥이다.
청담동 이탤리언 레스토랑 ‘리스토란테 에오’ 오너셰프인 어윤권은 좀 더 이색적인 조합에 도전한다. “묵은지를 깨끗하게 빨아서 하루 정도 물에 담근 후 꽉 짜서 준비하세요. 거기에 프레시 모차렐라 치즈를 넣으면 기가 막히게 어울리죠. 엔초비나 명란젓 중 한 가지를 함께 넣어 말고, 묵은지는 참기름이나 올리브오일에 살짝 볶아서 사용해도 풍미가 좋아요. 좀더 기교를 부리면 생 바질 잎이나 시소잎, 혹은 채 치거나 다진 생강 소량을 더해도 어울려요. 김밥을 말아 간장이나 올리브오일에 찍어 먹으면 재미 있는 맛이 납니다.”
서래마을 레스토랑 ‘스와니예’의 이준 오너셰프는 깜짝 놀랄 만한 레시피를 소개했다. “원래는 훈연을 통해 고등어 풍미를 살리지만 가정에서는 쉽지 않으니 가스레인지 그릴에서 구운 고등어 살을 발라 김밥에 넣어 보세요. 간장과 설탕 간으로 기름에 바삭하게 볶은 멸치볶음, 그리고 다진 화이트초콜릿 소량을 함께 넣는데 여기에 와사비나 무순까지 곁들이면 매콤한 향도 낼 수 있죠. 김밥에 초콜릿이 들어가는 게 낯설 수 있는데 고갈비 양념의 달콤한 맛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아요. 화이트초콜릿은 단맛뿐 아니라 풍부한 향이 나는 재료예요. 초콜릿 향이 슬쩍 스치는 정도로 적게 넣는 게 적당해요.” 이준 셰프는 화이트초콜릿의 크리미한 맛이 윤활유처럼 작용해 퍽퍽할 수 있는 고등어 살을 부드럽게 해준다고 덧붙였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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