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스레 봄바람이 거세다. 언제나 봄에는 바람이 많이 일지만 뉴스에서 태풍 급이니 뭐니 호들갑을 떨 정도니 여느 해보다 더 거세긴 한 모양이다. 모든 자연 현상이 그러하듯이 거센 봄바람은 농사에 좋은 것이다. 농사뿐 아니라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봄바람이 불지 않으면 지구상의 생물이 살아갈 수 없다. 누구나 알듯이 많은 꽃들이 봄에 피고 꽃이야말로 종 보존과 번식을 위한 첫 번째 출발, 암수가 만나 생식을 통해 씨앗을 만드는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의 둔한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한 쌍의 꽃이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게 봄에 부는 바람이다.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도 그런 구실을 하지만 절대적인 역할을 맡는 것은 역시 바람이다. 소위 충매화보다 풍매화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다. 하니, 다소 인간을 괴롭게 하는 거센 봄바람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 속에서 격렬한 꽃들의 입맞춤과 애무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난 주였다. 만개했던 벚꽃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던 밤, 야간자습을 끝내고 돌아온 막내가 뜻하지 않은 부탁을 했다.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고등학교 이학년 아들의 부탁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줄 각오가 되어있는 터에 부탁이란 게 겨우 잠깐 운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열한 시에 가까운 밤중이었지만 나는 행선지도 묻지 않고 일단 옷을 꿰어 입었다. 그런데 실로 뜻밖에 녀석이 지목한 곳은 지역에서 해마다 축제가 열리는 벚꽃길이었다.
전국 어디나 벚꽃 축제가 열리지 않는 곳이 없다 보니 이름도 없는 지역민만의 봄나들이가 되었지만 호수를 끼고 자라난 수백 그루의 벚나무는 수령이 오래되어 흐드러진 꽃들이 꽤 볼만했다. 가로등이 은은하고 낮에 보는 것보다 더 황홀한 느낌이어서 나는 그 며칠 전에도 한밤중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교과서 보기를 원수처럼 여기고 틈만 나면 게임에 몰입하는 녀석이 갑자기 벚꽃을 보러 가자니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들어보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교정에 커다란 벚나무가 두어 그루 있는데 체육시간이 끝나면 그 아래서 땀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나무에 물이 차오르고 작은 눈들이 돋고, 몽우리가 서고 마침내 온통 꽃들이 터지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에 찌든 아이들도 어쩔 수 없이 탄성을 질렀단다. 그리고 그 날 바람이 휘이, 불자 마치 눈처럼 쏟아지는 꽃잎을 보았다고 했다.
“너무 좋더라고.”
녀석은 재미없게 그 한 마디뿐이었지만 밤중에 꽃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일 정도로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낮에 북적이던 행락객들이 사라진 꽃길에는 가끔 두 손을 잡은 연인들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나는 녀석과 별 말없이 그 길을 걸었다. 벚꽃은 흐드러지다 못해 막 점점이 지상으로 낙하를 하는 중이었다. 가끔 ‘아, 좋다’를 연발하는 녀석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그 나이의 감수성이 어쩐지 갸륵해 보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절정의 나인인가. 그리고 어느 순간, 별 느낌도 없을 만큼 가벼운 바람 한 줄기가 일었다. 그 바람이 불러온 광경은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마치 폭설과도 같은 낙화! 비명처럼 짧은 탄성을 지른 녀석이 고개를 젖힌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안경을 벗고 눈자위를 닦았다. 천만뜻밖에 녀석은 울고 있었다. 벚꽃나무에 기대어 아들은 울고 나는 가만히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물의 의미가 전해져 왔다. 내가 왜 모르랴. 나 역시 밤새워 시를 읽고 연애편지를 쓰며 열병처럼 피어나는 청춘을 앓던 시기였다. 아무리 억눌러도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꽃들을 잉태하게 하고 아들을 울게 한 봄바람은 역시 좋은 것이다. 사족 하나, 믿기지 않는 반전으로 드러난 얼마 전의 총선 결과도 내게는 봄바람처럼 여태껏 마음을 설레게 한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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