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노후 시 벽 균열 생겨 납 유출…화재 시 붕괴위험
개원가 안전 사각지대… 환자ㆍ의사 입는 ‘납치마’도 문제
의료시설 관련 납 규제 전무…“의료기관 납 사용 유무 알려야”
병원에 가면 기념 촬영하듯 찍는 것이 X선(X-Ray)촬영이다. 엑스레이로 병변이 확인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는 컴퓨터단층촬영(CT)이다. 이들 장비는 방사선을 발생시켜 다양한 질환을 진단한다.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은 “병원에서 가장 흔히 촬영하는 단순 흉부 방사선의 경우, 촬영 시 노출되는 방사선 조사량은 0.1mSv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약 10일간 노출되는 정도 미미한 양이라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엑스레이와 CT 등 X선을 이용한 검사로 인한 방사선 노출과 위험보다 검사 시행으로 얻게 되는 이득이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들 장비 촬영 시 발생한 방사선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된 ‘차폐(遮蔽)’시설로 눈을 돌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방사선 장비가 설치된 구역은 방사선 피폭위험을 막기 위해 차폐시설이 들어선다. 국내 의료기관의 방사선 차폐시설의 주 재료는 중금속인 ‘납(pb)’이 사용되고 있다. 병원 촬영실 벽, 바닥, 출입문 모두 납이 들어있다.
차폐벽, 불 나면 납 성분 녹아 붕괴 위험
의료기관들이 납을 선호하는 이유는 경제적이고, 가공성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최근 신축병원을 짓고 있는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납을 이용해 차폐막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검토자체를 하지 않았다”면서 “무연보드 등 친환경 소재제품은 납보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방사선사는 “30년간 방사선사로 일하면서 납 말고 다른 소재로 차폐시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방사선 촬영 시 발생하는 방사선 피폭보다 납 유출 문제가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설이 노후화 되면 언제든지 납 유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선칠 계명대 의대 의용공학과 교수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시설이 낙후돼 납으로 이뤄진 차폐벽에 균열이 생기면 납이 유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용민 고려대 의대 환경의학연구소 교수는 “차폐벽에 균열이 생겨 납이 유출되면 공기 중에 떠다니다 호흡기를 통해 체내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화재라도 나면 치명적이다. 납 성분은 불연성 성질을 갖고 있지만 약 400도부터 천천히 녹기 시작해 550도에 이르면 액체상태가 된다. 이때 유독가스가 발생해 인체에 치명적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차폐벽이 붕괴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화재가 발생하면 납 성분이 녹아내려 쉽게 벽이 무너질 수 있다”면서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납을 대처할 수 있는 방어용 건축자재가 전혀 없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높은 농도의 납에 노출되면 현기증, 구토, 체중감소 등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방사선 장비를 사용하고 있는 정형외과, 치과, 산부인과 등 개원가에서 납 유출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들 의료기관은 기존 건물을 임대해 쓰기 때문에 구조변경이 어려워 대부분 납판을 벽에 붙여 차폐시설을 만드는데, 건물에 병원뿐만 아니라 식당 등 다양한 업종이 함께 사용하고 있어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화재발생시 유독가스 발생과 함께 차폐벽이 무너지는 2차 피해로 인해 건물 내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정기적으로 차폐벽 관리를 하지 않는 병원에서 납이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병원 폐업, 이전 시 차폐벽 철거도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익명을 요구한 관련 업체 관계자는 “폐기물 업체 인부들이 보호 장치 없이 차폐벽을 철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납은 특정관리폐기물인데 일반폐기물과 함께 처리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납 위험성
‘납치마’ 도 오래 쓰면 납 유출 우려
전문가들은 차폐벽과 함께 납이 주 성분인 방사선 차폐앞치마 등 의료용품에서도 납이 유출될 수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병원에서는 방사선 차폐를 위해 환자, 보호자, 방사선사, 의료인들은 납 방호복의 일종인 ‘에이프런(Apron)’을 착용한다. 조 교수는 “납으로 만들어진 방사선 차폐앞치마를 오래 사용하면 균열이 생겨 외부로 납이 유출될 수 있다”면서 “일부 병원에서 비용절감을 이유로 방사선 차폐앞치마 교체를 미루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납중독을 막고 안전성을 높이려면 의료기관의 납 사용 여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현재 국내 의료시설에 쓰고 있는 납에 대한 규제가 전무해 환자는 물론 의료기관도 납 위험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미 미국 등 선진국처럼 납 사용을 규제하고 있고, 사용할 때는 반드시 소비자에게 알리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납을 대처할 친환경 소재가 개발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현재 국내에서는 2013년부터 일본에서 바륨을 주 소재로 한 무연보드가 수입되고 있지만 납보다 비싸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은 “환자는 물론 의료진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납 대신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차폐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서 “친환경 소재를 개발하고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납 대신 친환경소재를 사용해 차폐벽을 설치한 의료기관에 ‘친환경인증’해주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일반인들이 방사선 피폭에는 민감하면서 정작 납 사용엔 둔감하다”면서 “납 사용에 따른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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