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의 아픔 한가운데에 제주가 있어
무거운 바위 하나 가슴에 얹은 듯 마냥 가벼울 수 없어
애끊는 마음에 공명하며 보내야 하는 제주의 4월
교통사고로 복부손상을 당해 응급 개복수술을 시행한 환자는 소장이 파열되어 완전하게 절단된 상태였다. 응급실에서 처음 마주한 그는 배가 나무판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극심한 통증으로 숨쉬는 것도 몸을 조금 뒤척이는 것도 힘들어했다. 마약성 진통제로도 가라앉지 않는 극심한 고통으로 그는 ‘어떻게 좀 해 달라’는 애원만 되풀이했다. 나는 그 환자의 고통을 수술로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겪은 고통이 얼마만큼 크고 깊은지,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에 잘 알지 못한다.
1948년 12월, 4.3의 광풍이 한창이던 때, 구좌읍 세화리와 종달리 주민들이 숨어 지냈던 다랑쉬굴이 토벌대에 발각당한다. 9살 아이 하나와 여인 셋을 포함한 총 11명의 주민들은 토벌대가 입구에서 피운 연기에 질식해 굴 안에서 사망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1992년 3월, 4.3 진상조사단에 의해 다랑쉬굴의 탐사 및 유해가 발굴되었다. 당시를 증언했던 종달리 마을 할아버지가 현장탐사에 동행했는데, 토벌대가 다녀간 이틀 후 굴에 와서 자신이 시신들을 직접 수습한 그대로 유해들이 보존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1949년 1월, 북촌리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마을 주민들이 소집당한다. 군인 두 명이 부근에서 무장대에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연관자 색출을 위해 군인들이 강제로 소집한 것이었다. 색출 전 주민들이 동요하자 경계를 서던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했고 이 과정에서 젖먹이를 둔 엄마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한다. 엄마에게서 떨어진 아이는 땅바닥을 기어 엄마의 몸에 기대고 가슴을 더듬어 젖을 물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자신의 명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이 어찌하지도 못한 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2014년 4월, 단원고 학생들을 태운 채 인천을 떠나 제주를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침몰은 서서히 이루어졌지만, 구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300명이 넘는 목숨이 그대로 4월의 차가운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흐르도록 침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고, 9명은 아직 실종상태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그리고 가족이 왜 구조되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야 했는지 알 수 없는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리와 광장에서 호소하고 있다. ‘애끊다’라는 말이 있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고통이라는 단어이다. 흔히 가족이나 자식을 잃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다.
4.3 이후 40여 년을 강요된 침묵 속에 살아야 했던 제주는 이제, 해마다 4월이면 곳곳에서 제의 향 연기가 피어 오른다. 4월이면, 무덤 아닌 곳이 없고 슬픔이 비켜간 곳이 없다. 4월이면, 선흘리 선인동자락 기억공간 re:born 에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제주 땅을 밟고 즐겁게 돌아다녔을 아이들의 모습이 선연해진다. 그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곳곳에 걸린 노란 리본은 더욱 진해지고 풍성해진다.
첫 글을 기고한 후 생각해보니 며칠 후가 4.3사건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4월 16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아픔 한 가운데에 제주가 있었다. 여전히 애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애끊는 마음 옆에서 무거운 바위 하나 가슴에 얹는 듯한 기분으로 마냥 가벼울 수가 없었다. 애끊는 마음에 공명하며 보내야 하는 시간, 제주의 4월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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