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저곳 널려 있는 메모를 정리하기 위해 하루 날을 잡았다. 스치는 생각들이 자라서 나를 만족시켜 줄 날이 오리라 믿고 없애지 못하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벽에 붙여두거나, 책이나 공책에 끼워둔 수많은 메모 때문에 산만하다 생각한 지도 오래되었건만. 잠자리에까지 놓여 있는 메모를 읽다 보면, 놀랍게도 스쳐 지나간 생각들은 대부분 반짝거린다. 진부하고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급히 적어 놓은 글에 불과하니 그럭저럭 감수할 만하다. 메모를 샅샅이 찾아내 정리하는 동안 정신이 자주 멍해졌다. 특히 일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관한 글을 읽고는 자책으로 눈앞이 흐릿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책을 읽지만, 읽은 책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 같다. 책을 닫는 순간 밖을 내다보던 창문을 닫아버린 것처럼 독서라는 행위가 내면의 풍경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이 메모를 쓸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일을 두고 한 치 양보도 없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의 증거가 메모로 남았다.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나서야 나는 그때의 생각을 아버지가 아닌 나 자신에게 대입시켜 본다. 낯이 화끈거린다. 내가 읽은 책이 내게 올바른 영향을 미쳤다면, 나는 일찍이 동서양을 아우르는 성현이 되어 있어야만 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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