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일에 걸쳐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센터에서 미국세계작가대회(AWP)가 열렸다. 작가, 독자, 출판사 관계자 등 수만 명이 참가해 매년 열리는 미국 최대 규모의 이 컨퍼런스와 북페어 행사의 올해 주제 중 하나는 ‘한국 페미니즘 시학과 번역’. 미국제국주의, 6ㆍ25 전쟁, 독재정권에 맞섰던 한국 현대사를 페미니스트 시인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는 자리다. 게다가 한국 현대시가 단일 주제로 조명된 것은 1967년 AWP 창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올해 초 미국에서 시집 발간을 계기로 행사에 초대된 김이듬, 김경주 시인은 현지의 뜨거운 반응에 얼떨떨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미국 전역을 돌며 낭송회를 하고 있는 김이듬 시인은 한국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초판이 매진되는 신기한 기적이 일어났다”며 “매일 두어 번의 낭독회와 컨퍼런스에 참가했는데 낭독을 들은 관객들이 책을 사러 바로 북페어장으로 이동하거나 행사장에서 마주치면 ‘시가 좋다’며 악수를 청하는 일이 계속 있었다”고 전했다.
해외에서 한국 현대시 바람이 심상치 않다. 열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김이듬 시집을 출간한 미국의 출판사 액션북스다. 이 출판사 대표이자 번역가 겸 시인인 요하네스 고란슨은 2012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김이듬 시인을 만나 적극적으로 시집 출간을 제안했다. 올해 초 나온 영역 시집의 제목은 ‘Cheer Up Femme Fatale’. 이미 출간된 시집 중 3권(‘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작품을 골라 번역가이자 재미 시인인 이지윤, 최돈미, 고란슨 대표가 함께 번역했다. 액션북스는 앞서 김혜순 시인과 이상의 시집을 펴낸 곳이기도 하다. 고란슨 대표와 그의 아내 조이엘 맥스위니는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김민정, 김행숙, 이원, 황병승, 김경주 등 다른 시인들과도 접촉했다. 김이듬 시인은 “두 사람이 김혜순 시인과 내 시집을 내면서 더 많은 한국 시인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계기를 얻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경주 시인의 첫 시집 ‘나는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는 미국 블랙오션 출판사에서 ‘I am a season that does not exist in the world’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미국의 현대시인이자 번역가인 제이크 레빈이 5년 간 서울대에서 비교문학 박사과정 중 시인을 만나 현지 출판사와 연결시켜 준 것이 계기였다. 시집 출간 후 두 사람은 자동차에 책을 싣고 미국 서부 8개 도시를 돌며 버스킹(길거리 라이브) 낭독회를 열어 독자들과 직접 만났다. 김경주 시인은 “낭독을 하면 의미뿐 아니라 우리 시가 갖는 특유의 리듬이 전달되기 때문에 현지의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한국 시에 진지한 관심이 싹튼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김경주 시인은 “2008년 김혜순 시인의 시집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출간 자체에 의의를 뒀던 경우가 많았다”며 “이후 한국 문학을 잘 아는 번역자와 출판사들의 노력으로 좋은 번역본이 나오면서 한국 시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주목 받는 작품들이 전통시나 근대 시인의 작품이 아닌, 지금 국내 시단을 이끄는 젊은 시인들의 것이란 사실은 의미가 크다. 시의 시대였던 1970, 80년대에 비하면 영향력이 줄었지만, 2000년대 ‘미래파’ 등 젊은 시인들이 꾸준히 등장해 기성 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이어져온 결과로 풀이된다.
김경주 시인은 “미국의 현대시는 딜런 토마스 이후로 특별한 확장 없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현지인들은)한국 현대시가 근대를 거치며 이렇게 많이 진화한 것에 대해 매우 놀라워한다”며 “케이팝, 드라마 등 한류 열풍의 주요 콘텐츠와는 또 다른 풍부한 문학 자원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보이는 듯 하다”고 말했다. 김이듬 시인도 “기존의 전통적인 계열의 시나 남북 문제를 다룬 시가 아닌 뉴웨이브 계열의 신선한 시에 이목이 쏠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올 여름엔 프랑스에서도 김이듬 시인의 시선집이 나온다. 고은, 신경림, 황지우 등의 작품을 번역해 최초로 프랑스에 알린 파트릭 모리스 이날코국립대 한국학과 교수가 재작년 한국의 여성 시인을 찾아 방한했고, 제자였던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가 김이듬 시인을 추천하면서 출간이 성사됐다. 출판사는 갈리마르와 프랑스대학출판사(PUF) 사이에서 조율 중이다. 조 교수는 “(한국 작품이)보통 국내 기관이나 재단의 지원으로 출간되는 것과 달리 현지의 요청으로 유력 출판사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한국 젊은 시인들의 거칠고 파격적인 언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유럽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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