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월 8일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천동 와우산 기슭(현 와우공원)의 시민아파트 한 동(와우아파트 15동)이 준공 3개월여 만에 붕괴됐다. 먼저 입주한 15세대(총 30세대) 주민과 아래 판자촌 주민 등 33명이 숨졌고 4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60년대 서울 주택상황은 열악했다. 54년 124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59년 200만 명을 넘어섰고, 67년 400만 명이 됐다. 이철용이 <꼬방동네 사람들>에 썼듯 변두리마다 “몇 집 움막을 치고 살던 곳이 몇 년 새 수백 세대의 천막촌으로 변”하고 천막에 판자를 덧대“하룻밤만 자고 나면 판잣집이 몇 채씩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66년 서울의 주택 부족률은 50%였고, 주택당 주거인은 평균 10.5명이었다.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에는 63~66년 서울시장 윤치영이 서울시 국감에서 한 발언이 인용돼있다. “내가 서울에 도시계획을 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은 바로 서울 인구 집중을 방지하는 한 방안입니다.” 64년 국회 내무위에서 윤치영은 “지방에서 서울로 진출해 올 사람은 각 도지사의 사전허가를 받고 다시 서울시장의 허가를 받는, 그런 입법조치를 연구해 주십시오”라고도 했다.
박정희의 무허가 건물 정리 지시가 그 끝에 나왔다. 66년 군인 출신 김현옥이 취임한 66년 서울 무허가 건물은 13만 6,650동이었다. 그는 4만여 동을 보수ㆍ양성화하고 9만여 동은 아파트 건립과 경기 광주 대단지 이주로 해결하고자 했다. 68년 말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이 발표됐고, 69년 32개 지구 406동 1만 5,840가구 아파트 건립공사가 시작됐다. 첫 현장 중 한 곳이 와우산 기슭이었다.
빈민 세간을 감안해 설계하중을 낮췄고(부실 설계), 저가 입찰ㆍ무허가 하청, 자재 빼돌리기 등 부실 시공. 6월 26일 착공한 아파트는 12월 26일 완공됐다. 실제 입주민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처럼 빈민이 아니라 ‘딱지’를 산 중산층이었다.
김현옥은 일주일 뒤 쫓겨났다. 시민아파트 안전도 검사 결과 405동 중 349동이 안전기준에 미달했고, 71~77년 101개 동이 철거됐다. 현존 두 동의 시민아파트(회현시민아파트, 남아현 시민아파트)는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며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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