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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매카시즘보다 강했다

입력
2016.04.0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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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유명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의회에 소환되고 고난을 겪게 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할리우드 유명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는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의회에 소환되고 고난을 겪게 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돈과 명예와 재능을 지녔다. 화목한 가정이 있고, 목장에 저택도 있다. 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중년의 사내는 어느 날 인생의 시험대에 오른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대해 사회가 압박을 가하면서부터다. 생각을 공유하던 동료들이 잇따라 불이익을 당한다.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주변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자신도 생업이 끊길 위험에 처한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회가 강요한 사상을 받아들이며 물질적 안락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으며 자존을 지킬 것인가. 영화 ‘트럼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택했을 길을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한 사내의 남다른 삶을 비춘다.

할리우드 유명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는 1940년대 초반 미국 공산당 당원이 된다. 대공황의 여파로 공산주의가 미국에서 세력을 넓혔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통의 적을 눈앞에 둔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돈독하던 시절이었다. 트럼보는 불평등이 당연시됐던 할리우드에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 주리라는 생각에 공산당을 지지했다. 동서 대립의 시대가 열리면서 트럼보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그의 사상에는 불온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남들이 부러워 할 부를 이뤘고, 자신과 계약하려는 영화사들이 줄을 선 상태에서 트럼보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의 일부 동료는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 생계를 이었고, 또 다른 일부는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 트럼보는 후자를 따랐다.

트럼보는 1947년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닥칠 무렵 미국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불려나간다. 사상의 자유를 내세워 증언을 거부한 그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불온주자들을 가리키는 ‘할리우드 텐(10)’ 중 한 명이 되고, 의회 모욕죄로 1년의 형을 살게 된다.

감옥을 나온 뒤 트럼보의 삶은 역전됐다. 목장을 팔고 좁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당장 생계를 걱정할 처지가 됐다. 영화계 인사들은 그를 외면했다. 배우 존 웨인을 지도자로 내세운 애국주의 운동이 할리우드의 주류를 차지했다. 트럼보는 싸구려 영화만 양산해내던 킹(존 굿맨)을 찾아가 가명으로 일거리를 얻는다. 트럼보의 재능은 다시 빛을 내고, 그는 11개의 가명을 돌려쓰며 음지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맹활약한다.

트럼보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이 쓴 '로마의 휴일'을 관람하며 감회에 젖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트럼보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이 쓴 '로마의 휴일'을 관람하며 감회에 젖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는 트럼보의 역경을 따라가며 20세기 중반 미국의 역사와 할리우드의 풍경을 복원한다. 미국을 휩쓸던 광풍이 영화인들을 어떻게 피폐화시켰는지도 들여다본다. 트럼보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돕다가 배신하는 배우 에드워드 로빈슨(필름 누아르의 효시로 꼽히는 영화 ‘이중배상’의 주연배우로 유명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트럼보를 자신이 주연한 ‘스파르타쿠스’의 작가로 영입하는 배우 커크 더글러스, 트럼보와 연대하다 먼저 숨을 거둔 시나리오 작가 앨런 허드, 트럼보 등을 위협하는 극우주의 스타 저널리스트 헤터 호퍼(헬렌 미렌) 등이 그려내는 각자의 삶은 1940~60년대 할리우드라는 모자이크를 만들어낸다.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연대와 고난, 가족들의 고통과 협심, 마녀사냥이 만들어내는 블랙 유머 등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어두운 정서가 스크린을 지배할 만한 영화인데 의외로 밝다. 특별한 재능에 의지해 역경을 헤쳐나가는 트럼보의 의지가 빛을 내고, 트럼보의 노동이 얻어낸 의외의 성과가 영화를 단조에서 장조로 바꾼다. 트럼보는 가명으로 쓴 ‘로마의 휴일’과 ‘브레이브 원’으로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한다. ‘영광의 탈출’과 ‘빠삐용’의 각본까지 담당하게 되며 그는 음지에서 양지로 당당하게 올라온다. 그가 가명을 벗어 던지고 할리우드를 돌던 블랙리스트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TV 인터뷰 장면에 가슴 뭉클한 쾌감을 느낄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20세기 중반 미국을 돌아보는데, 21세기 한국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사상 검증과 이념몰이, 마녀사냥에 대한 언론의 일조,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억압되는 개인의 인권 등은 지금 이곳에선 현재진행형 아닐까.

크랜스톤의 연기가 돋보인다. 담대하게 부당한 현실에 대처하고, 가열찬 노동으로 세상의 억압을 이겨내 성취를 이뤄내는 트럼보의 남다른 삶을 차분한 연기로 재현한다.

감독은 제이 로치. 코미디영화 ‘오스틴 파워’ 시리즈와 ‘미트 페어런츠’ 시리즈를 연출한 인물이다. 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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