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에 커다란 봉투가 꽂혀있다. 선거공보물이다. 봉투를 뜯어본다. 지역구 의원에 관한 공보물 몇 장을 쓱 훑어본다. 후보가 네 명 나왔는데, 네 명 모두 ‘섬김’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역의 일꾼으로서 발벗고 일을 하겠다고. 그 일이란 게 뭐냐하면 뭐 이거 저거를 막 건설할 것이며 버스를 몇 대 증설하고 어떤 공원을 조성할 것인지에 관한 얘기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공보물을 넘긴다.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의 무관심을 반성한다. 그러나 실로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섬김’이다. 지금 사는 지역에서도 1년 후에 이사를 갈지 2년 후에 이사를 갈지 모를 일이다. 이 지역에 아무개 후보가 당선되어 테마파크가 조성되고 창의사업 허브가 구축이 된다고 치자. 그 때쯤이면 내가 이 동네에 없다. 정류장 근처엔 또 치렁치렁 현수막이 달리겠지. ‘아무개당이 100억 예산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위아래로 똑같은 현수막이 달려있을 것이다. ‘사실 걔네가 아니고 우리 아무개당이 해낸 겁니다!’ 누가 해낸 것인지는 결국엔 모른다. 현수막 큰 놈이 눈에 잘 띌 뿐이다. 동네 정치가 우습다. 나의 무관심은 단순히 ‘시민으로서 나의 자질 부족’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이 대학가 하숙촌에서 선거운동을 했었다. “사람들이 우편함에서 공보물을 잘 안 가져간다”고 그는 말했다. 서울에서 자취 중인 대학원생 친구도 지역구 의원에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지역을 위한 일’은 그 지역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지역을 떠돌다 빠져나갈 사람들을 위한다고 목소리 내는 후보는 별로 없다. 그래서 자꾸 ‘지역구에 누가 뽑히든 뭔 상관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이 키웠다고, 이 지역의 아들이라고 뽑아달라는데 나는 이 지역에 이웃 하나 없다. 어찌됐건 뽑긴 뽑아야 한다. ‘여기 오래 살고 했으니 아는 사람도 많겠지. 일전에도 했다니까 더 잘 하려나.’ 나는 눈 감고 더듬더듬 내 표를 찾는다. 남을 위한 투표 같다. 내 정치가 아니니 시큰둥해진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친구는 나를 타박했다. “야, 그렇게 찍은 인간들이 다 저기 국회 가는 거잖아.” 그게 딜레마다. 나는 왜 표를 버리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가야할까. 나를 대표할 누군가를 뽑는 선거에서 내 손에 주어진 것은 딱 두 장의 투표용지. 그리고 그 중 한 장은 지역에 기반이 없는 나에겐 별 필요도 없는 종이 쪼가리라는 점. 나는 여성으로서 나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할 누군가를 뽑고 싶다. 청년으로서 나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할 누군가를 뽑고 싶다. 지역과 상관없이 떠도는 ‘나’라는 정치적 개인을 대변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내 손에 주어진 두 장의 표는 모두 그렇게 쓰여야 마땅하다. 이 표로는 내 정치적 의사 반영 못 한다고, 바꿔달라고 선관위에 떼쓰고 싶다.
애초에 테마파크를 짓겠다는 동네 후보에게 ‘여성’에 대해 물을 수 없다. 주민을 위한 운동장을 만들겠다는 동네 후보에게 ‘청년’을 물을 수 없다. 내가 버린 표를 먹고 국회에 입성한 지역구 당선자는 ‘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다. 내 한 표는 테마파크와 운동장이 필요한 ‘정착민’을 위해 쓰인다. 나의 억울함은 여기에 있다. 정착민이 못 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계약이 끝나서다. 전월세로 살면서 이 집 저 집 떠돌아야 하는 부평초 신세엔 테마파크는 남 일이다. 이렇게 버린 표가 모여 열 표가 되고 백 표가 된다. 남의 동네 건물 세워주는 투표 봉사를 나 말고 또 몇 사람이나 함께 하고 있을까. 동네에 자본 없는 사람이 생각하는 지역구 투표라는 게 이렇다. 허무한 마음으로 비례대표 공보물을 뒤적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맞나. 꽃도 뿌리 내릴 곳이 있어야 핀다.
조소담 비트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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