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 달라면 깎아 주고 바꿔 달라면 다 바꿔 줍니다.” 1일 서울 서대문구 금화초등학교 앞 육교 위에서 만난 노점상 김모(68ㆍ남)씨가 웃으며 말했다. 눈부신 오후 햇살이 김씨가 벌여 놓은 물건들 위로 쏟아졌다. 500원짜리 우산 꼭지부터 1만원 대 ‘첨단’ 전자기기까지 100가지가 넘는 상품들이 한쪽 난간을 따라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육교 위 만물상, 풍성한 진열대에 비해 뜸하기만 한 손님들의 발길이 아쉽다. “하루 종일 2만원어치 팔면 남는 돈은 한 5,000~6,000원 정도….” 김씨가 말끝을 흐리며 일어섰다. 때마침 손님이 왔다.
우산꼭지ㆍ코털깎이ㆍ미싱기름 등
100여개 상품 펼쳐놓은 만물상
“나이 들고 돈 없는 사람이 고객”
진열대에서 싱크대 거름망을 집어 든 차명심(58ㆍ여)씨가 “이게 우리집 싱크대에 딱 맞는데 마트에는 없고 여기에만 있더라고요.”라며 값을 치른다. 거름망 덕분에 단골이 된 차씨는 “요새 육교를 죄다 허문다는데 이 육교는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아저씨가 필요한 거 다 구해다 주시는데 없어지면 안되지….”라고 말했다. 멀어지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김씨는 “나이 들고 돈 없는 사람들만 사가요. 젊은 사람들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보고, 돈 많은 부자들은 육교 위로 올라올 일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주 고객이 '돈 무서운 줄’아는 나이들인 까닭에 단돈 몇천원짜리라도 에누리가 빠질 순 없다.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과 주거니 받거니 봄볕 아래 오가는 흥정도 정겹다. 육교는 늙고 빠듯한 이들의 삶을 징검다리처럼 이어 주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면 구두 수선 경력 33년의 김호철(63ㆍ남)씨가 육교에 의지한 삶을 이어 가고 있다. 그가 노원구 상계역 육교 계단 앞에서 신발을 수선한지는 올해로 15년, 육교가 처음 들어설 때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육교를 이용하는 주민들이 주 고객이다. 김씨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있는 육교는 이제 내 일상의 한 부분”이라며 “무엇보다 햇빛을 잘 가려 줘서 좋다”고 말했다.
육교 위 양지바른 공간이 삶의 희망을 잇는 징검다리라면 그늘진 육교 밑은 도심의 다락이다. 드러내놓기 민망한 잡동사니나 차마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의 집합소인 까닭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육교 계단 아래 비스듬한 구석,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다락엔 어떤 물건, 어떤 삶이 쌓여 있을까.
계단과 지면이 만난 비좁은 틈은 육교 아래 가장 낮은 곳이다. 흙인지 콘크리트인지 알 수 없는 척박함 속에서 이름 모를 잡풀은 별 불만 없이 자란다. 노란 잡풀 꽃 바로 위엔 누군가의 생계를 지탱할 리어카가 멈춰서 있다. 고개를 숙여야 손이 닿는 낮은 지붕 아래엔 자주 쓰지 않는 녹슨 도구들이 버려진 듯 놓여있다. 낡고 기울어진 회전의자는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육교 앞 점포 주인의 작은 호사용이다.
계단 아래 비스듬한 공간
자전거ㆍ리어카ㆍ오토바이 보관
기둥과 기둥 사이는 노숙인 잠자리
말끔한 보도 위에 설치하기 애매한 변압기, 분전함 등 전기공급장치는 육교 아래 리어카만큼 흔하다. 집배원의 오토바이와 운반 트럭 사이에서 잠시 우편물을 보관해 둘 철제 중간보관소 설치장소 역시 시민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도로와 접한 육교 밑이 명당이다.
계단이 높아 제법 쾌적한 공간은 주로 자전거 차지다. 거의 하루 종일 그늘져 있으니 특히 한여름 자전거나 오토바이 보관하기에 딱 좋다. 음료도 팔 겸 지친 다리도 쉴 겸 야쿠르트 아줌마가 걸터 앉은 휴식처 역시 육교 밑 시원한 그늘이다. 바로 옆에선 유행에 약간 늦은 듯한 마네킹 패션쇼도 가끔 펼쳐진다. 가장 높은 기둥과 기둥 사이, 다락 한가운데에 노숙인의 종이 박스가 자리 잡았다. 오가는 차량 소리가 시끄럽지만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차단한 박스 안에서 두 다리 뻗고 누웠다. 봄날 오후는 깊어가고 고단한 노숙인의 다락방 휴식은 끝날 줄 모른다.
사라져가는 육교
서울시내 보도육교는 1964년 보행자의 안전한 도로 횡단을 위해 퇴계로 남산국민(초등)학교 앞에 처음 세워졌다. 1973년 등굣길 교통사고로 학우를 잃은 원효로 남정국민학교 학생들은 학교 앞 육교 설치를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 후 산업화의 상징으로서 우후죽순 들어선 육교가 2000년 서울시내에만 248개에 달했다. 그러나 시설 노후로 인한 안전문제와 보행자 위주의 교통정책 추진으로 그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1960~1970년대 육교 설치를 요구하며 내세운 ‘안전한 도로 횡단’의 필요성이 최근엔 육교 철거를 바라는 민원의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육교 주변에서 빈번한 무단횡단 사고 때문이다. 지난해 9개의 육교가 철거되면서 현재 서울시내에 남은 육교는 157개다. 서울시는 이 중 7개를 올해 안에 철거할 예정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신재훈 인턴기자(세종대 광전자과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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