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 준비하며 찌운 속살
짠맛 단맛 절묘한 조합
명주ㆍ칼ㆍ웅피조개는 특히 제철
덩치 클수록 육즙도 풍부
봄, 조개의 화양연화
겨울 조개는 김 서린 찜솥에 둘러 앉아 푸근한 맛에 먹는다. 여름 조개는 마치 불꽃놀이처럼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는 불판 위에 구워 요란한 맛에 먹는다. 양식산에 수입산 조개가 지천이니 계절을 막론하고 조개 먹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봄 조개는 유독 각별하다. 4월 벚꽃이 피면 5월 라일락이 피는 것처럼 지당한 자연의 이치대로, 조개의 때가 봄이기 때문이다. 조개에게도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사람에게는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화양연화이지만, 조개에 있어선 가장 달고 뚱뚱한 봄이 화양연화다.
이를 맛보지 않고 지나가는 건 봄을 낭비하는 셈이다. 봄의 조개는 겨울과 여름 같은 드라마가 없는 대신 맛, 오로지 맛이다. 사시사철 흔한 게 조개라서 제철이 있나 싶다가도 봄 조개를 맛 보면 제철이 이래서 제철이구나 싶다. 겨우내 찬물에서 얌전히 몸을 사리고 있다가 봄이 시작되면 산란을 준비하며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가비 안에 오동통한 살을 채운 조개는 단맛을 잔뜩 낸다. 단, 산란기에 접어들고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몇몇 조개를 제외하고는 늦봄에서 여름 사이 일제히 산란기에 들며 식중독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열해도 파괴되지 않는 독소가 있으니 산란기에는 잘 가려서 먹어야 한다. 산란기가 곧 금어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어차피 시장에 나오지 않으니 큰 걱정 할 필요는 없다.
환경에 따라 이름도 모양도 맛도 다르다
물고기는 재빨라서 맨손으로 잡기가 요긴하지 않은 반면, 조개라는 건 만만하기가 짝이 없어서 고생대부터 요긴한 식량 자원이었다. 당시 인류가 벌였던 조개 잔치의 흔적은 바닷가 동굴의 패총으로 종종 발견된다. 바닷물에 들어가거나 펄을 파면 나오니 사냥이랄 것도 없이 자갈처럼 주워 먹는 것이 조개다. 고생대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인류는 여전히 이 만만한 사냥에 심취해 여름 휴가철 바닷가마다 현대화된 조개 사육제를 연다. 쏙쏙 잡아내는 재미에 아이들이 신나다가 두둑한 소출이 쌓이면 어른이 더 신나는 '조개잡이 체험'이다. 사냥의 만만함과는 별개로, 아무튼 조개가 진화가 잘 된 생물은 아니라서 자웅동체이거나 성장 과정에서 성별을 바꾸기도 한다. 껍데기가 두 개로 가장 흔한 이매패류(二枚貝類) 조개들은 위아래 조가비가 단단한 근육으로 붙들기와 여닫기를 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다른 조가비끼리는 아무리 크기가 같아도 도무지 닫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개 체험할 때 한 마디 거들기 좋은 조개 상식이다.
기특한 것은 조개가 환경의 동물이라는 점이다. 조개는 바닷물을 빨아들여 영양소를 흡수한 후 다시 물을 뱉어내며 살아가는데, 그가 자리 잡은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색과 모양이 다르다. 같은 바지락이라도 서쪽 펄에서 자란 것이 거무죽죽하고 남쪽 모래에서 자란 것은 누르스름하다. 물이 좋아야 밥도 맛있는 것처럼, 조개 맛도 그 동네 물맛을 탄다. 환경에 따라 생김새는 물론 맛까지 다르다 보니 조금만 지역이 뒤섞여도 조개 명찰은 대혼란을 맞는다.
대합은 개조개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지역에 가면 크기가 큰 백합을 대합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방 대합이라고 부르는 조개는 또 대합과는 좀 다른 웅피조개다. 맛조개는 죽합이라는 이름을 따로 갖고 있지만 맛조개 중에서 홍맛조개라고 하는 전혀 다르게 생긴 조개도 따로 있다. 이름 복잡하기로 ‘끝판왕’은 명주조개인데 지역마다 다르게 불리는 명칭만 늘어 놔도 시 한 편이 나온다. 명주조개, 명지조개, 노랑조개, 갈매조개, 갈미조개, 개량조개, 명주개량조개, 해방조개, 아오야기(?柳(あおやぎ)), 바카가이…. 명지조개는 낙동강 하구 명지 삼각지에서 많이 나서 붙은 이름이며, 노랑 조개는 겉도 속도 노란 빛을 띠고 있어서고, 갈매조개와 갈미조개는 내민 발 모양이 갈매기 부리를 닮아 붙은 이름과 그것이 변한 것이다. 해방조개는 해방되던 해에 이상스레 많이 나서 붙은 이름, 바카가이는 다른 조개들과 달리 평상시 입을 벌리고 발을 내민 멍청한 모양을 놀리는 이름으로 한국말로 풀이하면 바보(ばか) 조개(貝)가 된다. 경험 많은 어부라도 동네를 벗어나면 생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름에 혼란스러워지는 게 조개다.
봄 조개가 펼치는 은은한 단맛의 향연
그래서 조개 이름은 산 데서 듣고 그거 하나 믿는 것이 속 편하다. 대표적인 조개 몇 가지에 특징적인 조개 이름 몇 개만 알아도 봄 조개 잔치엔 지장이 없다. 대합, 백합, 모시조개, 바지락, 가리비, 꼬막, 홍합 정도가 조개의 기본편이요, 조개의 응용편은 왕우럭조개, 웅피조개, 명주조개, 새조개, 맛조개쯤이다. 왕우럭조개는 코끼리조개, 말조개, 부채조개, 주걱조개, 껄구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패주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크고 길쭉한 수관이 특징이다. 웅피조개는 앞서 얘기한 대로 북방대합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럭조개처럼 큼직한 수관을 갖고 있다. 명주조개는 국물 내기엔 적합하지 않으나 살을 먹기엔 마침맞은 조개다. 달달한 맛이 핑 도는 부드러운 육질이 일품이다.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도 흔하게 나오지만 동해안 바다 밑바닥에서 나는 것이 가장 달콤하다. 새조개는 얘기가 길어지니 뒤로 미루고 맛조개 얘기부터 하자면 대나뭇대처럼 길쭉하게 잘 생겨 죽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깔끔한 단맛이 매력적인 조개다. 조개 구멍 주변에 소금을 넣으면 ‘뿅’ 고개를 내미는 것이 재미있어 갯벌체험에서 인기 타는 조개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봄 조개철에 앞서 몇몇 겨울 조개들이 분위기를 달궜다. 빨간 피가 흥건한 피조개는 짜르르하게 쏘는 향에 단맛이 어우러진다. 그와 껍데기는 비슷하지만 좀더 작고 훨씬 흔한 꼬막은 속은 살짝 덜 익도록 가볍게 데쳐 하나씩 까 먹다 보면 절묘한 ‘짠단’(짠맛+단맛)에 손을 놓을 수 없다. 가리비는 큼직한 관자가 몰캉하게 씹히는 게 일품이다. 관자는 특히나 더 질깃해지기 쉬우므로 강한 불에 잠시 넣었다 빼는 정도로 슬쩍 익혀 먹어야 맛있다.
새조개는 단맛이 청량하다. 바다 속 우물에서 퍼낸 물맛이 그러하리라 상상해보면 딱 그 맛이다. 다시마 육수에 온갖 채소와 함께 데쳐 먹는 샤부샤부가 일반적인 조리법이지만 사실 생으로 먹기에도 좋은 조개다. 내장을 빼내고 먹기도 하지만 선도가 보장된다면 내장까지 한 입에 해치울 수 있다. 녹진한 맛이 더해진다. 목포낙지 최문갑씨가 대개 식당에서 새조개 내장 맛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새조개가 해감이 까다로운 종류예요. 새조개는 부리(실제로는 발)를 움직여서 뒤뚱뒤뚱 날아다니거든요. 기본적인 해감 방법은 같지만 돌아다니면서 펄을 뱉을 만한 공간이 돼야 해감이 돼요. 좁은 곳에 꽉 채워두면 전혀 해감이 되질 않죠.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하면 내장이 녹아 버려서 못 먹게 되는 거고요. 시간이 지나면 뱉었던 펄을 다시 집어 먹기도 해서 물도 자주 갈아줘야 해요. 손이 많이 가지만 맛은 최고죠.” 그는 원래 제철이 1, 2월인 조개지만 올해는 유독 철이 늦어져 이제서야 먹을 만 하게 알이 차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내다본 올해 새조개철은 4월 중순까지다.
지난 겨울 바다가 변덕스럽긴 했던 모양이다. 평년이라면 이미 시장마다 다 풀렸을 봄 조개가 한 발 늦어 이제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시즌스호텔 서울 일식당 ‘키오쿠’에 갔다가 올 봄 처음으로 봄 조갯국을 맛봤다. 봄바다 향기가 진한 국물은 백합으로 내고, 큼직한 명주조개 살과 나무두릅을 올렸다. 시원하고도 달큼한 맛에 감칠맛이 확 돌았다. 키오쿠 이상권 셰프는 봄에 맛볼 조개로 명주조개와 칼조개, 웅피조개를 꼽았다. “조개는 작은 건 발라 먹기 힘들고 짠 맛만 나는 경우가 많아서 저희는 산지에서 큰 걸 골라 받고 있어요. 어느 조개건 클수록 맛이 좋은데 살을 먹는 명주조개, 칼조개, 웅피조개는 특히 덩치가 클수록 육즙도 풍부하게 느낄 수 있죠. 국물 낼 때는 작은 조개도 많이 쓰는데 바지락이 대표적이에요. 일본된장을 푼 것 같은 달달한 감칠맛이 특징이죠. 백합으로 낸 육수도 일품인데, 백합은 좀더 짭짤한 감칠맛이 나요.”
굳이 사냥에 나서지 않더라도, 식당을 찾지 않더라도, 조개의 봄 풍류는 손쉽게 즐길 수 있다. 봄바람 살살 부는 주말, 거리를 채운 봄꽃 향을 따라 봄 조개를 사러 시장에 가는 것만 해도 정취는 충분할 것이다. 은근 까다로운 손질? 시도해보지 않았던 요리? 그마저도 풍류의 일부가 될 것이다. 게다가 옛 사람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다. 꼭 특별한 조개를 힘겹게 구하지 않아도 하루는 충만하게 마무리 된다. 봄 조개는 다 맛있으니까.
이해림 푸드라이터 herimthefoodwriter@gmail.com
조개, 얼마나 아세요?
돌조개: 서해안에서 흔한 조개. 해변의 바위에 붙어 사는데 위장술이 뛰어나서 돌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꼬막조개과에 속하는데 꼬막처럼 쫄깃한 속살을 갖고 있다.
새조개: 겨울 한 철 나왔다 들어가는 조개. 목포낙지 조문갑씨에 따르면 올해는 바다 수온이 높아 알이 늦게 차서 봄에야 먹을 만하게 자랐다.
명주조개: 동해안 속초, 고성 등지에서는 바다 밑바닥에서 잡아 올리고 남해안과 서해안에서는 모래 밭이나 펄에서 파낸다. 단맛이 강해 살을 발라 먹기 좋은 조개다.
주름백합: 활백합이라고도 부른다. 동해안에서 민들조개라고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림 6섭
섭: 겨울철 포장마차 국물감으로 활약하는 홍합은 사실 개항 후 씨앗이 들어온 외래종 진주담치다. 자연산 홍합으로 구분돼 불리는 섭은 따로 있는데 크게 자라면 손바닥만하다.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손질에서 요리까지, 조개학개론
조개는 고요해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요란한 동물이다. 가리비는 껍질을 홱 열어 젖히기 일쑤고 대합이나 백합류 조개들은 물을 찍찍 쏴댄다. 바지락은 끊임 없이 바시락거려서 바지락이고, 새조개는 숫제 날아다녀서 이름이 새조개다. 그래서 조개를 고를 때는 그 활발함을 기준 삼아 고르는 것이 방법이다. 시장이나 대형마트에서 물 밖에 쌓아놓고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껍데기를 손으로 슬쩍 건드렸을 때 발을 쏙 집어넣는 정도의 생명력은 있어야 신선한 조개라 할 수 있다.
요즘 조개는 대부분 해감이 된 채로 유통되지만 그래도 모래가 씹힐 때가 있다. 바닷물 정도의 농도로 소금물을 맞추는데, 맛을 봤을 때 생리식염수와 비슷한 염도가 적당하다. 조개가 물에 푹 잠길 정도로 물을 넉넉하게 잡아야 조개가 돌아다니기도 하면서 해감을 잘 하니 참고하자. 숟가락 등 쇠붙이를 넣으면 조개가 쇠비린내를 맡고 모래를 토해낸다.
물에 담가둔 조개는 검은 비닐봉지나 쿠킹포일로 덮어 어두운 환경을 만들어줘야 더 활발하게 움직이며 펄을 뱉어낸다. 실온보다 약간 서늘한 곳에 1, 2시간 두면 되는데, 냉장고에서는 너무 추워서 기절하거나 죽는 때도 있으니 차라리 바람이 통하는 베란다가 낫다. 조개의 해감 환경은 염도에서부터 밝기, 온도까지 여러모로 바다에서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유통 중 잠자코 있던 조개들이 집에 온 줄 알고 활동을 시작해야 해감이 되기 때문이다. 용기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물 쏘는 소리가 들리면 조개들이 편하게 해감 중이라고 보면 된다.
조개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싱싱하다는 전제 하에 회로 먹을 때가 가장 맛이 좋고, 그 다음이 뜨거운 육수에 1, 2초 스치듯 익히는 샤부샤부다. 그 다음은 찐 것, 삶은 것, 오븐에 구운 것과 직화에 구운 것 순이다. 원리는 불이 덜 닿고 조리를 덜할수록 맛있다는 것. 조개의 단백질은 응고되면 단단해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수분을 많이 갖고 있어서 익으면서 물기가 빠져나가면 질깃해진다. 조개를 쫄깃한 맛에 먹는다고도 하는데, 오래 익혀 소가죽처럼 질겨진 것과 쫄깃한 질감을 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치아에서 살짝 저항감이 느껴지는 정도의 부드러운 탄력이 조개 요리가 지향해야 할 상태다.
조개는 각종 찌개와 탕, 죽의 육수 재료로도 흔히 이용되는데, 국물을 내고 조개를 버리는 게 아니라면 육수용 조개와 살 발라낼 조개를 따로 조리하는 것이 좋다. 준비한 조개의 반 정도를 덜어 육수를 오래 뽑은 후 버리고, 나머지 절반을 조리 과정 마지막에 따로 넣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다. 버려지는 조개가 아깝다면, 육수를 낼 때 조개를 중간에 건져내 살을 발라 추려둔 후 껍질로만 육수를 빼는 방법도 있다.
이해림 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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